베드로 사도는 노아의 홍수 때에 순종치 않은 자들이 곧 죽은 자들이요 옥에 갇힌 자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옥에 갇혔다는 것은 인생 그 자체가 갇혔다는 의미입니다. 갇혔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뜻대로, 지은이의 뜻대로, 즉 목적대로 살지 못하는 모든 것입니다. 망치가 부엌에서 채소를 썰기 위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자기 존재 목적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옥에 갇힌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의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은 것은 노아와 같이 방주를 만들라는 것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방주에 타라는데 타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만들라고 하셨지 사람들 모두에게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순종치 않은 것은 방주를 만들고 타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고, 홍수의 원인에 관한 것입니다.


홍수가 일어난 원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아 혼인한 것을 인함입니다. 그 혼인의 결과 네피림 곧 위대한 자들이 나타나났는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창 6:1-3)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아내로 삼고 위대함을 낳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의 마음에 죄악뿐이라고 하시고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신다고까지 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과 사람 사이에 육신으로 낳은 아들이란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신화에서나 찾을 일이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 하나님의 의를 가져야할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사람의 딸들은 신이 아닌 사람들끼리 낳은 딸들이란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게 여기는 형식, 외식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본질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배필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을 좋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어야 하는 하나님이 지은 사람들이 세상이 아름답게 여기는 것들을 자신의 형식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에서 아름답게 여기는 것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랬더니 용사 곧 네피림이라는 위대함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함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시절에 그 땅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의 것을 아름답게 여길 때에 이미 그 사람(땅)들 마음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위대해지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마음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배필로 삼았더니 아들로 내어났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크게 지어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니 위대한 교회 건물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생각을 죄악으로 여기십니다. 사람이 낮아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버리고 높이 올라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마음, 그것을 죄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취하여 네피림이란 위대함을 낳은 것이나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하늘에 이르려고 한 것이나 다 같은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넘쳐나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빌어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세상의 성공을 얻으려 하고 그렇게 세상에서 성공하여 받는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당연히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높고 영광스럽고 위대한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 장로들이 모여서 노회장, 총회장과 같은 자리를 만들고, 성경과 신앙을 학문으로 만들어 목사, 석사, 박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행사가 바로 노아 홍수의 원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들을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에 죄악뿐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모두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시고서 홍수를 일으키셨는데 그 홍수가 발생하는 과정을 보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서로 섞여서 홍수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둘째 날에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신 이래로 섞인 적이 없는 것이 다시 섞인 것입니다.


천지창조의 때에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나뉜 것은 하나님의 밝음, 곧 빛을 만나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되면 사람이 가진 존재의 갈증, 곧 자기 안에 채우려는 것들 중에서 무엇이 하늘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땅에 속한 것인지 구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하나님의 아들의 세계로 하나님의 마음이며, 무엇이 세상의 영광과 아름다움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하수도처럼 그 세상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에 이것이 섞여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빛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존재 안에 무엇을 채워야하는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경도 세상의 가치도 또한 세상의 성공과 아름다움도 모두 다 취하고 자아 안에 채우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다 죽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갈증을 채울 물들이 넘쳐 나는 것 같은데 그것으로 인하여 다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존재이 목적대로 하나님의 의를 자기 안에 채워 그의(갈비뼈)를 표현하는 것을 자기 배필로 삼아야 함에도 그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름답게 여기는 것을 배필로 삼아 세상이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이루고 자기 배필로 삼으려 하는데 그것이 곧 죄악이고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아의 홍수 때부터 있는 불순종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섞여 넘쳐나는 것에서 자신이 구분되도록 방주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 물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성경 말씀을 뒤섞어 놓은 곳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교회와 가치관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뿐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섞여 버린 물에서 자신을 방주로 구분한 것입니다.


세례가 곧 그것입니다.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물 속에 들어갔더니 자신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단지 물로 머리를 적시거나 세례 예식에 참여하여 수조의 물에 자신의 몸을 담갔다가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는 자신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방주인 것입니다.


때로 교회를 세상 속의 방주라고 합니다만, 그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면 오히려 그곳이 죄악의 소굴인 것입니다. 세례가 구원의 증거라고 여기지만 그런 예식이 세례의 본질이라 여긴다면 그 또한 눈에 보이는 형식을 본질로 아는 것이니 오히려 죄악인 것입니다. 방주와 세례의 본질은 오히려 그런 가치관,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 것이나, 형식을 본질로 아는 것에서 자신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방주고 세례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