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세계 안에서 소위 말해서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의외로 낮아진 예수님의 모습과 등진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은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낮아진다는 것을 태도나 말을 공손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실은 만남과 관계를 이루는 본질의 흐름에서 찾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만남에서는 성경에 대하여 얼마나 아는지, 능력을 얼마나 행할 수 있는지, 교회나 신앙 세계에 이룬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가 관계를 이루는 본질입니다. 


목사를 만나면 성경에 대하여 더 안다는 것이 이미 정해져있고, 40일 금식이라도 하면 이미 그것이 관계의 운동장을 기울입니다. 공로가 많은 장로도 말할 것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 만난다는 것이 성경과 기적과 영광을 위한 만남이니 그런 것이 바로 만나는 관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낮은지 높은지가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낮아짐의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능력에 대하여, 또한 공로에 대하여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공손한 자세를 취해도 실상은 높은 자인 것입니다.


가끔 교회 안에서 목회자라는 작자들이 연루된 각종 범죄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미 그 만남을 이루게 하는 관계의 근본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혀 낮지 않은 자리에서 말을 거룩하게 하고, 옷을 경건하게 입고, 태도를 공손하게 한다고 낮아졌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외식이고, 높아진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낮은 자리에 있는 것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 소망을 물어오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에 대하여 물어오는 이들에게 더 알고 가졌다는 입장이 아니라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하라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몸을 드려 수고하라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것이 겸손하게 생명으로 대하는 것이고,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이 소망을 물어오는 이들을 대한다는 것은 그들의 주장 앞에 자신이 죄인이 될 수 있기에 두렵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관계가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관계이기에 두려움으로 공손함으로 대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때껏 알고 겪은 것과 같이 목사가 하라는 식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물어오는 이가 주장하는 주장에 가진 자가 자기 자신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이라도 더 가졌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더 가진 이유는 단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가지지 않은 자를 위한 수고입니다. 수학에 대하여 더 가진 수학 선생은 수학을 알지 못하는 학생을 위하여 자기 육신을 수고하여 가르치고, 때로는 학생이 처음 대면에서 자지 주장대로 문제를 풀어가더라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이 아님을 알기 까지 참아내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 온유와 두려움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더 가진 자는 세상에 없는데, 자기들이 하나님을 안다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그 꼴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수용하시므로 십자가에 끌려가심을 순종하셨던 것이 바로 온유와 두려움으로 소망을 물어온 자들을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그렇게 소망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성직자(물론 형식이 성직자일 뿐이지만)들은 신앙의 의문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에 자신이 확신하는바 하나님을 주장하고, 심지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물어 오는 이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여 괴롭게 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고, 또 교회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심지어 마귀의 소행이라며 저주하기 까지 합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하여 깊이가 더 있다고 생각할수록 더 심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이런 모습은 단지 운유와 두려움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소망에 대하여 물어오면서 때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으로 인하여 곤고해지는 것을 신앙 없는 것으로 정죄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런 것 앞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하게 봐도 그 생명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세습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가 가는 방향과 다른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 향하여‘ 신앙 없는 영적 전쟁의 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럴 리도 없지만 교회 세습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도 아니라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철회하고 일이 흘러가는 것대로 두고 순종하면 그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도 그 주장대로 하면 많은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그 주장대로 하므로 손해와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자기 주장에 대하여 뉘우치는 고백 없이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망이란 그런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의로움에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것, 때로 그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결국 소망을 물어오는 사람도 무엇을 보고서 자기 스스로 깨닫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깨달을 수 있는 이미지(형상)를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도와 같은 것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며 십자가를 지신 겸손함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삶에 대한 경외함과 두려움을 가지고서 사람을 대하는 것,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인생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와 두려움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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