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3:13-22) 두려움과 의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4. 30. 09:28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열심히 행하면 고난을 받을 것인데 그것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기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의를 위하여 사는 것을 해하려 하는 것을 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모습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의를 핍박하는 자들이 핍박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두려움은 두 가지 조건 하에서 발생합니다. 하나는 시간적으로 미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미래라고 해도 자기 생각이나 바람대로 되면 그것은 기대가 되지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미래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미래가 분명해지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자기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는 미래가 바로 두려움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신앙이나 사회나 특히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여겼다면 굳이 죽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빌라도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빌라도 입장에서 예수님의 두 가지 죄목인 신성모독과 반란죄 중에서 관심은 반란죄뿐인데, 자신이 볼 때 그 몰골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사람들을 선동한 죄 값으로 몇 대 쳐서 방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늘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 그 증거인데, 그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하실 것이라고 여겼고, 또 무엇보다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기 때문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구도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카네기 자서전인가에 보면 ‘죽은 개는 발로 차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 것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가서 곤고하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곤고하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일을 행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좇아 사는 이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고 의문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그것을 보면 자기와 상관있는 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면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함이 드러나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삶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므로 심판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법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법이 나타나니 생명의 법을 가지지 않은 모든 자들은 생명의 법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앞에서 죄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들은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자기 생각을 좇아 그 생각을 육신으로 행하여 하나님께 이르려 죽으라고 애쓰고 있는데, 자기들이 그렇게 노력하는 것과는 반대로 가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가만히 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본성을 가진 성도들 역시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졌기에 모두들 위로 올라가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데, 아래로 내려가고, 자기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행여 저것이 사실이 아닐까 싶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렇듯 어떻게든지 높은 곳에 올라 그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려 노력하고, 그 영광 이루는데 해가 되지 않으려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려 애쓰면서 살아도 그것이 온전치 않아서 늘 불안한데, 자기들이 하는 것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한 것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절기를 지키며, 율법을 외워가며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서도 자신들이 그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 못하는 유대인들 앞에,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겪는 갖은 질병을 고쳐내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세가 놀라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진 모든 두려움을 자아내고 드러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예수님을 시험하듯 하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두려운 만큼 의문도 많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곤고하게 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두려움과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노력하게 합니다.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임에도 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가진 불확실성에 대하여 안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크고 많은 것을 다수결과 같은 선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 스스로가 확신하지 못하지만 많이들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큰 길로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안에는 늘 의문이 있습니다. 또한 불만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이 자기가 가진 의문과 두려움을 다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들 그렇게 하는 것 같으니 자신도 그냥 큰 길로 따라가고, 한 편으로 교회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여 교회에 갔다가 오면 이런 저런 불평들을 하면서도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또 막상 두려워서 그나마 익숙한 두려움 속에 그냥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조금만 솔직해져도 지금 안주한 자리를 자신이 확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고, 조금만 상식이 있어도 어차피 지금 있는 자리도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해 마냥 노력만 하고 있을 뿐이니 앉아서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같은 것이니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찾아 나설 것인데 이런 것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달리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이들이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확실히 다르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큰 길로 가는 평안입니다. 자신은 불안하지만 너도 나도 같이 가니 서로에게서 위안을 받는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평안은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것과 같이 확신 또한 넘쳐나기에 두려워하려 해도 두렵지 않는 그런 평안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인 것입니다.


한편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생명으로 사는 삶에 대하여 의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사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의문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달리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애매히 고난 받아도 즐거워하는 이들에 대하여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니고데모와 같이 밤에 찾아오기도 하고,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이와 같이 자기 의를 증명하고자 찾아오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이들에게 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이들은 그 마음에 생명이 있고, 생명은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이 소망하는 바가 있기에 그 소망 가운데 삽니다. 그 삶은 자기 삶을 두려움과 의문과 혼동 속에 살고 있는 자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예비하라는 것은 그 대답을 가진 본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언제 어떻게 물을 것을 알고 그것에 신경 쓰며 대비하겠습니까? 그냥 자기 안에 있는 본성대로 사는 것, 그것이 항상 대비된 것인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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