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다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즉 생명의 본성에서 유추하여 볼 수 있는 것이여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선한 양심이라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나 선함도 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선함도, 소망도, 양심도 모두 그런 것을 본성으로 가진 생명을 가졌다면 베드로 사도의 권면대로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생명 없이 노력을 통해서, 믿음이라 착각하는 신념을 통해서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그칠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가기 가진 의로 인함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다르게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의를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이룰 수 있는데 문제는 자신들의 의를 좇는 세계에서 그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육신으로 문자 그대로 지켜내어야 육신의 평안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을 문자 그대로 육신으로 지켜내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미래에 자신이 원치 않는 결과가 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하고 그 두려움을 이기려 끊임없이 행위를 단속하고, 행위로 노력해서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행위로서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것 같지 않은데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이루며 산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그것입니다. 메시아는 병든 자를 고친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율법에서 일하지 말라고 한 안식일에 병을 고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를 백성들이 따르니, 예수님과 달리 금식하고 의복을 차려 입은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칠 수 없으니 그 갈등과 두려움은 상당했던 것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일이 그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밤 중에 찾아 왔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기도 하고, 니고데모 자신은 예수님과 같은 세계에 대하여 밤과 같이 어둡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세계를 알려고 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바가 확신하는 것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니고데모와 같이 육신으로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난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이 없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물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이유를 물어오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답하시기를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이들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 아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이들의 질문은 사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으로 대표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은 예수님과 같은 표적을 나타낼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맥락에서 보면 ‘소망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내게 소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을 가지고 사람들이 물어 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로 볼 때 베드로 사도가 물어 오는 것에 대한 대답을 항상 준비하라고 한 것 역시 거듭난 <생명>이 되라는 것입니다. 즉 거듭나서 생명이 바뀌면 언제 누가 그를 대하여도 그 생명으로 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를 바다에 던져도 고양이듯,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에 소망을 언제라도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볼 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노후에 대한 불안감, 살아가면서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까 하는 근심과 염려는 모두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문을 가졌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물학자들이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것은 사람이 동물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행동을 보면 학자가 아니라도 ‘사람이 다 그렇지’라고 이유는 설사 몰라도 사람의 행동은 서로 이해를 하지만 사람이 동물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볼 때 가진 의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이 자기 안에 없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이들을 볼 때 가지는 의문은 자기 안에 그 의문스런 생명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도 그리스도의 소망이 없는 사람도 모두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거듭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단순한 것 하나를 인정하지 못해서 인생이 늘 두렵고 근심이 많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사람들이 와서 질문하는 것에 답하는 것을 준비하기를 바라서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는 것은 마음 곧 심령에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그 소망을 가진 생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두려움도 근심도 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있는 것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답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 생명을 가진 이들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한 의문을 가진 이들을 대할 때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하여 어떠하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곧 그 생명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 이유를 물어 오는 이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때에 그것을 물어온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또 그것을 설명함에 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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