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선함이라고 하면 착하고 봉사하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밥을 퍼주는 봉사나, 도덕과 예절을 잘 지켜내는 것과 같은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행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을 행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되기도 하고, 반대로 사람들이 볼 때는 전혀 선하지 않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선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유대인들에게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선함은 밥 퍼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으로 여기시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선을 행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디까지는 생명에게 적용하는 말입니다. 생명이 없는데 움직이는 것은 ‘작동한다.’도 하지 행동한다고 하는 것이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하게 행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생명을 가지고 행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깨닫는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여기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고서 선한 생각과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의 행사는 ‘천로역정’에서 담을 넘어 들어온 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것을 위하여 몇 년씩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히 안타깝지만.


선과 악에 대하여 잘 설명한 사건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이여!’라고 부르다 혼난 청년의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예수님이 선한 것은 분명한 것인데 그 청년이 왜 혼이 났을까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시다는 것이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는 말씀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 청년이 책망을 받은 것은 자기 안에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볼 때 예수님은 선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 ‘무엇을 할까?’였습니다. 즉 무엇을 할까에 대한 기준으로 보니 자기 눈에 예수님이 선하게 보였는데, 그가 본 것은 틀리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책망한 것은 그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 한 분만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사건을 본다면 지불을 뚫고 친구들이 내려준 중풍병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이 마음으로 참담하게 여김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죄를 사한다고 하심에 대하여 가진 참담한 마음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에 사람이 죄를 사할 수 없다고 여기기에 그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자들의 생각이 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기 위하여 보내신 예수님께서 죄를 사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과 달리 자기들이 가진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생각을 가지고 판단하는 자들을 악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는바 열심히 행하라는 선은 밥 퍼주고, 교통 신호 잘 지키고, 착한 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달리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의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열심히 행하라고 한 선한 행함은 오직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 그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일까? 그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와 변화 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밥 퍼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우리를 해하지 않을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 같이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몇 번의 글에서 설명한 ‘애매한 고난’의 실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있다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밥 퍼준다고 고생하면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인하여 어떤 육신이 수고해야 할 상황에 자기 육신을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선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밥을 퍼 줄 수도 있고, 착하게 살게 되기도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이들 중에는 그것을 악하게 여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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