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회에서 듣는 설교 중에서 상당수는 도덕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 윤리적 관점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또한 평소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설교합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도덕시간 같은 내용인데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학교 도덕시간에는 ‘사회와 국민으로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데 반해, 설교에서는 그 이유가 단지 ‘예수를 믿기 때문’으로 바뀐 것뿐입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천국에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는 이유는 교인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신앙관이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 믿는다는 것의 본질이 행위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질적 요소를 안다면 당연히 그것을 전할 것인데, 전하는 내용이 전부 도덕적인 행위를 권면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것이나 혀를 금하거나 제어하라고 또 재갈을 물리라고 하는 것이나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 모든 것을 일일이 행위로서 지켜내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육신의 행위인데 이를 제어하기 위하여 육신의 능력을 가지고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보안 시스템은 결국 사람에게 뚫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행위 규범은 결국 지켜야 천국이든 하나님 나라든 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 지켜야 하는데 도덕시간처럼, 윤리 행위 규범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 이래로 대부분의 인생들이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눈에 그것이 최상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더 나은 것을 보기만 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추구할 텐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달리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게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켜가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위 규범의 대부분은 사도들이나 구약의 율법에서 나온 것이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위 규범적이 관점에서 말씀하시지는 않았음에도 예수를 믿고 그 말씀을 지키려는 인생들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즉 책으로 보면 행간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하고자 한 것은 행위 규범이 아니라 존재 규범인데 예수님을 믿는 것을 행위 규범에 두고 있다는 것은 예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담 이래로 어떤 인생도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서 모두 지켜낸 인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은 나서 누구나 죽는다는 것과 동일한 명제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적어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 법도 한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둡고 예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게 몸이 교회에 다닌다고, 자신이 교리 문답에 ‘아멘’이라고 말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게 아닌가?’라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정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켜내지 못함에도,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사도들이 이를 요구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하고 말을 조심하라고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예외 없이 모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위를 전하지 않은 예수님을 믿은 제자들과 사도들이 행위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성경을 신학으로 공부하고 싶다면 이런 것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행위로 하는 것에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방법을 구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행위를 성경이 요구하는지, 그러면서 다 지키라고 하는지, 또 한 편으로 보면 예수님은 행위를 구하지 않으셨는데 그 제자들과 사도들은 왜 그것을 권면하고 있는지 이런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성경을 제대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을 제대로 묵상하면 성경은 도덕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을 도덕 윤리 책으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들은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자신들이 성경은 도덕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성경의 본질을 종교적 윤리 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하라, 또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단순히 그 행위를 본질 혹은 타켓으로 두고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그 행위가 가져올 지옥에 가는 것과 같은 결과 또한 본질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은 행위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그런 행위를 지켜내는 존재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며, 스스로 있다고 하시는 그 존재성이며, 생명이라고 하시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성경은 존재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입니다. 단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이 가진 의로움이 자기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아 버렸기에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빛이 왔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도 서로의 관계에서 상대가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욕을 해도 괜찮은 경우가 있고, 칭찬 같이 좋은 말을 해도 모욕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것도 아이들이 공부하는 행위 자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지 공부하는 행위 자체가 본질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듯 행위는 언제나 의(도)의 표현일 뿐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사도들이 행위를 전하지 않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행위를 권면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정도에 생각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어둡고 자기 옳은 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러면서 자신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구원이 없다고 여기면 듣기라도 할텐데 말입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도 율법이나 성경을 문자 그대로 다 지킬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은 자 마다 이미 다 간음한 것이라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설교 시간을 윤리 강연 시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단지 윤리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성경에 결부시키면서. 그러나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적 말씀은 그런 행위를 하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지 그 행위를 잘 지켜 행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개는 개 노릇하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개 노릇이 가진 근원적인 곤고함은 있겠지만 그 근원적 곤고함(집 밖에서 잔다는 것과 같은)에도 불구하고 본성이 그러하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김 아무개 교수의 딸이 돼지우리에 발가벗고 뒹굴면서 돼지가 되고 싶다면서 사진을 찍고 난리를 친 적이 있는데, 그런다고 몸이 돼지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 정신이나 정체성은 하나님 앞에서 돼지보다 나을 것이 하등 없는 존재임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행위는 결국 본성에서 비롯된 결과이고 다음 공정입니다. 본성이 먼저 있어야 행위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려면 예수님과 같은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이 먼저지, 성경을 몸으로, 행위로 지켜내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전하는 각종 행위 규범은 그 행위를 몸으로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위를 구하지 않으셨는데 제자와 사도들이 행위 규범을 권면한 것은 예수님이 전한 생명을 가지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들이 체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본성이 자기 안에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서 자기 삶을 보니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삶을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도 되지 않았던 것들이, 또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조차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인하여 그렇게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그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들 속에 있는 윤리 규범과 같은 것은 그 행위를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행하게 하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고, 이것이 보이지 않으면 성경을 윤리 책으로 보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후자는 회 칠한 무덤과 같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