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와 같은 말씀을 대하면 사람들은 없는 동정심도 이끌어 내고, 멸시하는 마음이 들지만 억지로 불쌍히 여기며 잘난 체 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며 억지로 겸손하려고 합니다. 즉 자기 마음에 없는데 성경이 그러라고 하니까, 안 그러면 벌 받아서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아니면 그래야 죽어서 천국가고 그곳에서 잘 살 것 같아서 그렇게 합니다. 다들 성경을 그렇게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필연적으로 그 억지로 하는 것을 잘 하기 위한 각양의 방법이 필요하게 되고, 그런 방법이 바다처럼 널리고 널린 세상을 살펴서 좋아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옵니다. 금욕적인 생활 습관을 가지거나, 마음을 다스리고 수련하는 것과 같은 것이면 될 것 같아서 그것을 도입합니다. 교회의 건물을 크게 짓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상의 것들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바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는 노아 시대의 일인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솔직해진다면 성경대로 산다면서 노력하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 안에 있는 것과 반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화를 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대로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에는 화가 났다데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력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화가 났는데 그것을 억제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다 계획대로 되면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바칩니다. 그렇게 신앙이라는 것이 행위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한 것이 같은 말씀인데, 사도들이 ~을 하지 말라고 말씀한 것은 사람의 겉 행위만 그러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을 지금의 신앙인들이 크게 착각하고 타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하라, 또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생각조차 그것과 무관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인 것인데, 그냥 행동으로 그러지 않으면 다 된 것인 양 생각하고, 그렇게 드러내지 않으면 좋은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위로 드러내지 않으면 행위가 의롭고, 그 의로움 속에는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참아낸 공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행위의 공로를 드리는 것입니다. 소유(물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까운 마음이 있는데 헌금하고는 그 헌금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입니다. 물론 때론 마음까지 그럴 수 있지만 문제는 성경은 ‘항상’, ‘언제나’, ‘온전히’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니 단 한 번이라도 마음까지 순전하지 않았다면 그간의 모든 것이 다 허사가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안타깝게도 너무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마다 행위의 방법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누구는 ‘이렇게 하자’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저렇게 하자’고 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우기고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어떨 때는 도저히 교회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방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저항하는 것과 같은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 신앙의 모습에 의문을 가지고, 또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내지 못하는 자기 삶의 하염없는 노력들에 회의를 느껴야 하는 것임에도 눈이 어둡고, 자기를 너무 사랑하므로 그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몸이야 일요일이면 성경 들고서 교회에 가지만 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졸거나, 다투거나, 집중해서 들어도 삶으로 구현하기 힘든 설교를 듣고서 그 값으로 헌금을 내고, 결혼식 답례품처럼 밥 한 그릇 얻어먹고서는 마치 숙제 했기에 모든 공부 다 했다는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 할 바를 다 한 것 같이 스스로 위안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거나, 누군가의 질문을 받거나, 토론에 임할 때는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라는 것처럼 그 끝없음에 아예 포기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단지 노력할 뿐’이라며 봉합하고선 또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다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천국에 간다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러다보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복권에 인생을 걸 듯 그러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라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경의 계명의 수만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 100가지 중에 한 가지를 어기면 안 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성경을 지키는 영역 또한 행위 뿐 아니라 마음과 본성까지 빠짐없이 성경을 다 지켜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마음은 화가 나는데 행동으로 지켜냈다고 성경을 지킨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온전히 지켜내려면 말씀 그대로 <마음과 뜻과 정성> 모두가 다 성경을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인하여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도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화내던 일이 이제는 화가 나지 않는 일이 되어야 그 생각까지 성경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면 다 성경을 지키는 노릇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잘하면 잘 할수록 하나님께 죄가 커지는 것입니다. 무덤에 회 칠을 화려하게 할수록 기만하는 것이듯.


그러면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보는 것 까지는 이르렀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세상을 보면 그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볼 수 있고, 주변에도 또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안타깝게도 문제의 파악까지는 그렇게 해 놓고서 다시 <더 노력하자>하는 세계의 법을 가져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정황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 곧 구원은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 답입니다. 예수님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했는가? 예수님은 행위로 의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행위는 십자가에 처형될 행위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입니다. 즉 생명의 본성이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되어야 비로소 성경을 지키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그냥 교리 문답시간에 ‘아멘’이라고 했다고, 아니면 4영리와 같은 짧은 성경말씀을 듣고서 ‘그렇구나!’ 동의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면 거듭나지고 그리고 나서 거듭난 사람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라며 힘들고 어렵게 그것을 지켜내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신용카드 할부 같은 것이라서 먼저 지불하고 차차 갚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다 갚지도 못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예수 믿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육신으로 산 세월 동안 옳다고 여긴 것을 벗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도 10달이 걸리는데 평생을 자기가 옳다고 살던 사람이 성경구절 몇 마디에 완전히 거듭나는 것과 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람이 거듭났다고 하면 자기로서는 어떻게 이 성경을 부인하려고 해 보아도 안 되고, 성경을 어기면서 살려고 해도 되지 않고, 말씀을 전하려 하지 않으려 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지경은 되어야 비로소 이제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리 단순하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긴 자기 의를 육신에서 벗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씨와 같이 심기고 성령으로 그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그리 짧지 않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산 세월이 길고 주장하던 의가 강할수록 오래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난 생명은 생명으로 비롯되어 살아가므로 생각과 행동 그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성경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거듭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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