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고난이라는 무겁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보면 일상적이지 않던 주제로 성도들을 위로한 베드로 사도는 갑자기다 싶게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말씀은 곳곳에 나오는데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에 대한 말씀을 육신의 남녀에 대한 것으로만 보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시각의 전부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거듭나지 못하고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본질로 알고, 형식인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아내나 여자는 단순히 결혼과 함께 아내가 되는 육신으로 여자인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랑이고 모든 성도들이 신부라는 것이 또한 그렇습니다. 교회가 신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 몸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는 예수님의 생각과 뜻과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듯 모든 사람이 신부가 된다는 것도 예수님이 가진 의와 뜻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본질적인 구조는 의가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세상으로 나타났다는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그 육신으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신 십자가를 거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부활이라는 의미에 이르기까지 의와 뜻이 육신과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구조는 곧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를 보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남자, 여자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대변되고 표현되는 존재는 의와 뜻을 가진 존재이고, 그 의와 뜻을 형식으로 표현해 내는 존재가 여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인 것입니다.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소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기본적으로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고 공손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은 육신으로 여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형식을 가진 존재는 그 형식의 내용이고 본질인 의와 뜻을 가진 존재에게 공손하고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아내에게 공손하라고 말씀하면서 ‘이와 같이(벧전 3:1)’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와 같이’는 자유하나 그 자유로 종과 같이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은 애매한 고난을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길 잃은 상태에서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님께 돌아오는 회복된 삶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형식들은 그 뜻하신 바를 나타내는 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인데, 이 법을 남녀의 결혼으로 나타내셔서 남편과 아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역할극이기도 한 것입니다. 남편은 의를 가진 자의 역을, 아내는 그 의를 형식으로 나타내는 역을 맡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결혼과 가정의 삶을 보면 남자는 남편으로서 가정의 의를 가집니다. 성씨를 가지고 있고, 가업을 이어 갑니다. 그런 의를 가지고 자녀를 낳음에 있어 아내 된 여자가 그 의를 형식으로 가진 아들(자녀)을 낳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그렇게 아버지의 의가 어머니의 육신으로 통하여 육신이란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듯 하나님이 가지신 의가 인간이 가진 형식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육신이란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육신으로 나타난 것을 육신 가진 자가 보고서 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가 육신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존재고, 그 존재를 보고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는 사람 안에 그 발견된 그리스도의 본성이 심기는 것이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는 것이며, 그 생명이 또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의 본질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들, 곧 형식을 가진 자들은 의를 가진 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와 형식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의와 형식에 있어 어느 편인지만 알게 되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을 선택의 문제로, 또 의지를 가지고 순종해야 하는 문제로 보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니 순종이 안 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인생을 살게 하신 뜻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자, 여자라는 각각의 존재로서 모든 것을 알아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심과 같이 남자와 여자가 한 몸(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 인데 이는 그렇게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삶을 서로 보게 하여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배우고 깨닫고 또 누리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남자는 육신으로 그 역할을 하여 여자에게 교훈이 되게 하고, 여자는 또한 형식을 이루어내는 존재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므로 육신 가진 남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여자로서 어떤 순종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고자 하심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라는 이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아는 것이 핵심이고, 그 뜻을 수행함에 있어 남자와 여자로 주신 육신으로 그것을 밝히고 표현해 내는 것이 본분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또한 남편과 아내로 인생을 살게 하심을 눈에 보이는 형식만 보고 육신으로 남자 여자라는 것만을 본질로 볼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는 것은 신앙 자체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입니다. 행위는 형식을 본질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내를 향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이 단순히 육신의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내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의 가장 우선은 하나님의 의를 형식으로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육신으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선 포스트들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나 그 자유는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을 순종하는 선택을 위하여 자유를 주신 것임을 알고 자유를 그렇게 활용하고, 그렇게 자유를 활용한 선택은 의인이 죄인들 앞에서 스스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인생들의 주장 앞에서 섬기는 사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우리의 삶이 세상의 의로움과 자기 선악의 기준을 가진 이들이 볼 때 참으로 애매하고 어리석은 고난과 같아 보이지만 놀랍게도 그 삶을 사는 이들에게 그것은 참 영광되고 평안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 생명이 된 사람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하면서 고난뿐인 것을 전했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상식적 측면에서만 봐도, 사람들이 보기에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은 인생으로 슬픈 일일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맥락에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서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 순종하는 아내가 되고, 또한 순종하는 아내가 사랑받는 것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성경의 본질적인 구조를 알아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남자들은 자기가 남자로 나는 것에 자신이 기여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유세하는 바보가 될 것이고, 이유도 모르고 순종해야 한다는 억압 속에서 사는 여자의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본질을 알면 아내가 순종하는 것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그리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와 인생의 목적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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