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기 행동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화를 내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지켜 내려고 화나는 순간에도 화를 참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화를 참으려면 결국 화를 억제해야 하고, 이를 위하여 신념과 의지를 동원합니다. 화가 나는 순간 성경 말씀을 떠 올립니다. 더 정확히는 성경을 지켰을 때의 보상이나 지키지 못했을 때 벌을 생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게 잘 되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각자가 강점을 가진 영역에서는 되지만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들어가면 아담 이래 모든 인생들이 인생을 살 동안 그렇게 신념과 의지로서 성경을 지켜낸 자가 없었고, 없으며,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거나 아니거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 여러 가지를 가미합니다. 악한 생각이 들 때 육신을 괴롭히기도 하고, 학문으로 연구된 세상의 좋은 방법과 시스템들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당근과 채찍을 동원합니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가면 사탕을 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 어떤 세계에서도 말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안 될까요? 사람들의 생각처럼 자기 의지가 부족해서?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아니면 인생이 연약해서? 그게 아닙니다. 이는 성경대로 살기 위해 관리와 통제를 맡긴 자기 의지와 신념과 생각 역시 성경대로 살아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욕으로 욕을 갚지 말라고 하니 화가 날 때 참고, 다른 사람들이 악한 행동을 할 때 왼뺨을 들이대듯 자신은 선함으로 대하려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은 악으로 악을 갚고 싶은 마음이나 그것을 보고 왼쪽 뺨을 들이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결국 같은 자기 육신 안에 있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것에서 나온 것끼리 서로를 제어하려 하니 때로는 이것이 이겼다가 때로는 저것이 이겼다가 하는 것입니다. 단지 상황이나 경험과 같은 것에 종속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삶을 성경대로 이끌어가려면 우리 육신 안에서 나오는 것, 제어할 어떤 것이나 제어할 권한을 가진 것이나 다 육신의 것이라면 그것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려면 육신보다 근원적인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본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제어하려는 육신의 모든 것이 다 우리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본성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바뀌지 않는 이상 본성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본성은 생명의 현상이고,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이 바뀌지 않았는데 성경을 지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자신이 성경을 지키려고 아주 열심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실패해서 기도할 때 마다 회개부터 해야 한다면 생명이 바뀌지 않은, 거듭나지 않은 생명이라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욕으로 욕을, 악으로 악을 갚지 않기 위해서는 생명의 본성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본성이 바뀌지 않고, 거듭난 생명으로 악이나 욕을 대하지 않는데 그것을 이겨낼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욕을 먹는 것과 악을 당한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본성이 있어야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행위를 본질로 보지 않는 것이며,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며,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기는 것이 의로운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가는 것을 의로 여기는 본성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본성으로 세상이 가진 악이나 욕을 대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을 이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김이 되시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인함인 것이지, 군병들에게 맞서 군사로 맞서 이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육신이 악으로 곤고해 졌을 때 육신의 신념으로 그것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앞에서부터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한 것으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이라는 것이 바로 세상이 다들 위로 가는 것을 의로 여기는 중에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은 낮은 자리로 가기 때문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낮아지는 것을 악한 것으로 보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은 낮아지는 것을 의롭고 선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려면 신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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