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황금률’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어쩌면 성경대로 사는 것의 모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 성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모든 말씀이 이 두 말씀에 함축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욕으로 욕을 갚지 말라는 것도 일종의 황금률이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하여 많은 사도들이 세상이 자신을 욕하고 악하게 대하여도 악으로 다시 갚지 말고 선함으로 대하라고 하는 말씀들을 많이 하였는데 이 또한 황금률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원수는 참 극한의 상대라서 눈에 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악하게 대하는 이들을 선함으로 대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원수도 사랑하는데 삶의 작은 부분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를 다시 한 번 언급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존재에 대한 규범으로 볼 것인지를 상기해봐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예로 든다면, 행위로 원수 된 자가 있고 존재로서 원수가 된 자가 있습니다.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원수가 되는 것은 행위로 인함일 것이고, 성경을 존재 규범으로 보는 사람에게 원수는 존재로 인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악은 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것이고, 성경이 말하는 원수 역시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것은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뜻을 떠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보고 악에 빠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원수 역시 남의 밭에 가라지를 밤에 뿌리고 가듯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자기 옳다고 살아가면서 다른 인생들에게 까지 그것이 옳다고 따르라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하며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켜내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목회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정말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과 자기 삶을 자신의 주장대로 세상을 살고, 자신이 가진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악함과 동일하게 사람을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갚아도 되는 것이 복음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것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 자들이 십자가로 끌고 갈 때에 아주 위대한 기적과 능력으로 그들을 벌하셨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욕으로 욕을 갚지 말라는 것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것보다는 오히려 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욕한다는 것은 자기 의로 볼 때 ‘저 꼴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욕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선한지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의를 가지고 ‘저것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며, 저것이 무슨 신앙이냐?’며 애매한 고난을 받는다는 이들을 심판하고 욕한다는 것이 바로 악함이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욕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애매한 고난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욕하는 것이 바로 악함이기도 한 것이고 그렇게 욕을 하고 악한 모습을 보이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의와 선과 악의 기준을 주장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그런 주장이 있다면 누군가는 그 주장으로 인하여 육신을 수고하여야 하게 되므로 그 육신의 수고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이들이 수고하게 되는 것이며 그 수고가 바로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매한 고난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미 욕으로 욕을 갚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욕으로 욕을 갚지 말라고 하고 바울 사도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했다는 것은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그 말로 인하여 욕하고 싶고 악으로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유효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 그 자체가 이미 욕으로 갚지 않고 악으로 갚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런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이미 자기 의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진 이들로 인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성도들의 형편 자체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가 대신 받은 고난에 참여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에 들어 있다는 위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위로가 25절에서 이전에는 길 잃은 양 같더니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 왔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왔다는 것은 장소로 돌아 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위로하고 있는 성도들의 정체성입니다. 그 성도는 앞선 몇 개의 포스트에서 이야기 한 그런 정체성과 삶의 모습과 본성을 가진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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