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애매한 고난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의인이고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으로 삼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과 같이 의로우나 오히려 죄인이 되는 것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삶의 한 순간의 일이 아니라 삶 전체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다는 것을 증거하면서 그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애매히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위로는 그랬습니다. 오늘날 삯꾼 목자들이 밥벌이 삼아 강대상에 서서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이 겪고 있는 곤고한 일들이 풀려서 육신이 평안하게 되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반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고 참아야 하는 이유가 고난을 견디고 나면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고난을 견디는 목적이 상급에 있는 것이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셔서 얻는 상급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난은 보상을 기대하거나 결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지만 새롭게 얻은 것이 없습니다. 영광을 얻고 부활하셨는데 그게 상급입니까? 예수님은 원래 가만히 있어도 온전히 영광스러운 분이시고, 원래 죽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이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성,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는 아버지의 본성에 이끌려 살다보니 애매한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영광얼 얻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본성 자체가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본성이 의인이 죄인 앞에서 죄인이 되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 보이셔서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육신 가진 인생의 존재 의미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목적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 만한 영광이 없습니다. 축구공이 박물관이 잘 보관되면 영광스러울 것 같지만 사실은 경기장에서 발에 차일 때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듯, 인생도 고난을 참고 견디면서 얻는 보상이 있다면서 그 보상을 받을 때에 영광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축구공이 발에 차이듯 육신을 소비하는 그 자체가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우리의 육신은 약해지고 쇠잔하며 늙고 보잘 것 없이 되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발에 차여 너들너들해진 축구공의 모습은 축구공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삶을 산 것이듯 인생 또한 하나님 주신 육신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그 육신이 종과 같이 수고로이 살아가는 애매한 고난의 삶을 살고 나서 늙어 낡은 모습이 되면 그 모습 속에서 그간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었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이고 인생의 영광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심인데 그 계획이 말씀이 되니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며 우리 안에 생명이 되는 본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을 살며 육신이 평안해지려하고 그 평안을 얻으면 영광스럽고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며 육신이 평안해지기까지 고생한 것을 고난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그 고난 끝에 평안한 삶을 보상으로 또 상급으로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 말들은 모두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실 운명 그 자체로 인하여 이제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요 17장)하심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영광이나 복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본성에 이끌리어 수고하듯 살아가는 그 삶 자체가 영광스럽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고 하심도 이것이고,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하심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이끌려서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성에 이끌리어 십자가를 지심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하나님의 의와 뜻에 이끌리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 삶의 총화가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는 애매함의 극치입니다. 의인이 죄인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 만한 애매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며 그 본성으로 거듭나고자 하면서 예수님을 빌어 세상에서 성공하겠다고 하는 것은 완전한 망상이고, 그렇게 된다고 말하는 자들이야 말로 멸망의 사기꾼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고생이나 하는 것인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서 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삶의 한 절이라도 그렇게 살아 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평안하며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살고 있는데 그 보다 평안하고 영광스러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엔진을 생각해 보면,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폭발이 일어나고 열로 인하여 식혀주지 않으면 견질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지고 또 식히고 또 폭발하고 아주 빠르게 회전하는 고난 속에 있지만 그러라고 만든 것이니 그렇게 더 잘 할수록 평안하고 영광스러우며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도 그러한데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만드실 때 목적하신 바가 있고 그것을 아들을 보내어 보이셨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왜 영광스럽지 않으며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영광스럽지 않은 것은 단 하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 그 뿐입니다. 자기가 목사 아니라 목사 할애비라도 이것뿐입니다.


더욱이 이 삶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유일한 삶입니다. 예수 이외에 구원을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으니 예수님의 본성으로 사는 것 외에 구원이 없고,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하게 여기시는 것뿐이니 예수님과 같이 애매히 고난 받는 것, 의인인데 죄인이 되고 종과 같이 섬기는 그것만이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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