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큰 권세로 압니다. 아닐 것 같지만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고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많은 곳이므로 그곳은 자신이 구해야하는, 정확히는 구원을 베풀 장소고 사람이며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세상에서는 큰 권세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분야에서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들은 어떤 자리에 가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에 밝고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압니다. 하지만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서도 샌다는 말과 같이 세상에 나가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도 자기 인생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하는 능력 있는 시녀 정도로 압니다.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로 알고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한다는 것입니다. 명분은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니 내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이의 비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비유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고 세상에서는 권세를 휘두르는 꼬라지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단편적으로 본다면 교회 안에서 거룩하다고 치부한 가운을 입고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고 세상에 나가면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대접을 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신학박사나 목사 같은 직분이 생긴 것입니다. 대접 받으려고. 라이센스가 다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종이라는 고백이 온전하다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하나님이 자신을 지은 목적을 이루는 종과 같은 존재라는 고백이 온전했다면 세상 앞에서도 종과 같이 할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세상에서 얼마 안되는 채권으로 내노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비유를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데 세상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은 자신의 구원이 필요한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냉정하게 생각하면 세상에서 겸손을 떨고, 착하게 살려는 의도 역시 세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본을 보이고 모범이 되어 세상을 훈계하고 각성시키고 깨우치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에 답을 하지 않는 세상을 늘 비난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서 밖에서 맞은 아이가 엄마에게 이르듯이 기도합니다. 세상이 개판이니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예수님을 바로 안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안다는 것은 알고 있는 바를 가지고 모르는 이들 앞에서 종이 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또 기독교가 세상에서 개독교 소리를 듣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더 슬픈 것은 그렇다는 것은 결국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욕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목숨을 건 일이기 때문에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자기 종교나 유대교를 믿는 이들과 같이 자기 신앙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선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목숨을 걸 일이 아니라 자유로이 보장되었는데 오히려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단지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미 아담의 때부터 타락했는데 오늘날 갑자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 앞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향하여 하신 일을 성경에서 보고도 그렇게 따르지 않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믿는 믿음 안에 예수님을 끼워 넣은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세상은 구원을 받아야 하고 또한 그 구원이 예수님으로부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하시기 위하여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의는 죄악이고 세상에서 난 것이지만 그 불의한 것 앞에 자신의 육신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나 신앙인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자신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깁니다. 이것은 지금의 교회나 신앙인들이 가진 신앙의 정체성과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가 세상에서 죄인이 되므로 세상이 그것을 보고 돌이켜 구원을 받게 하시는 법을 보이셨는데 그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자들은 오히려 세상을 가르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와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굴복하라고 한 것은 세상이 옳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대하는 본성이 그러해야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본받고 그와 같이 행하여야 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세상의 의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타락했으니 하나님의 종인 자신들의 말을 들어야 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삶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거나 아니거나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세상을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프레임 안에서의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어쩐 본성으로 살 것이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타락했고 죄악이 넘쳐나니 성경대로 살자고, 성경이 옳으니 이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신들은 그것에 물들지 않으려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삶은 세상의 주장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되는 그런 삶입니다. 세상을 가르치려 도덕적으로 행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동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타락하고 죄악된 세상이 주장하는 주장 앞에 자신의 육신을 수고롭게 내어주는 종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물론 무엇이 온전한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과 자기 본성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어 그렇게 사는 것의 온전함의 차이는 논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앞에서 종이라는 것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이러자 저러자’ 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로 전할 것은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주장 앞에 자신을 죄인과 같이 종과 같이 내어 놓자는 것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가 그런 수고를 하라고, 그렇게 종과 같이 자신을 내어주고자 할 때 내어줄 수 있는 것으로 주셨다는 것을 아는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종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앞에서도 종이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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