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18-25) 애매한 고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4. 5. 16:16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한 안목과 관점의 전환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목과 관점이 전환되었다는 것은 생명과 존재 정체성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거듭난 것이라고 합니다. 거듭난 안목으로 바뀐 안목은 바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관점 그 두 가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거듭남으로 인한 현상입니다. 거듭남 없이 세상을 달리 보려고 노력한다거나, 아니면 세상의 경험이나 인생의 시련으로 얻은 교훈이나 공부해서 얻은 지식과 같은 것으로 안목을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거듭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것이 거듭남의 현상으로 인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과 인생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인데, 이전과 어떻게 다른가 하면, 이전에는 세상과 인생이 모순이고 부족한 것이며 진화론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에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에 그 생명이 가진 본성과 안목으로 세상과 인생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세상에 대하여 순종하라고 말씀하는 것도 이 거듭난 생명을 가지고 보면, 이것은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사도들이 그렇게 말하면 거듭난 사람은 이 말씀이 그 뜻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 순종하지 못하지만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면 자신이 세상에 순종하지 못함을 이상한 것으로 또 죄로 여기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알기에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신 가장 온전하신 의인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도들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순종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고,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에 대한 위로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는 이 베드로전서의 말씀 속에 베드로사도는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의 정체를 이야기 해 가고 있습니다. 환난이라는 것은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애매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애매하다는 것은 ‘이게 맞나?’ 싶은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의 최고봉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또한 모든 인생은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고 전했는데, 하나님이 만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보고, ‘저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야?’라며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은 상황이야 말로 ‘저래도 되는 거야?’라는 상황인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애매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본성을 가진 제자요 사도인 베드로 사도가 환난이란 애매한 것이라고 말씀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과 같은 고난을 당하는 것을 환난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의인이 죄인들에게 죄인이 되어 당하게 되는 애매한 일들, 그것이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죄로 인하여 매 맞고 참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죄야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하나님이 죄라고 하시는 것은 사람이 무슨 행동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이 블로그 전반을 통하여 말씀드리는 성경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 그것을 모르고 또 외면하면서 사는 모든 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 죄 중에 있을 때는 항상 환난이 있습니다. 이는 천지창조를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자들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인생에게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안목과 관점이 열리는 생명이 없으면 인생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간혹 인생은 ‘고(苦)’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 가운데, 즉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을 알지 못하여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이 없어 하나님의 안목과 관점과 가치관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잘못되었고, 자이 자신을 비롯한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면 다 악하고 약하며 부질없고 보잘 것 없이 부정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족할 수 없이 삶이란 감옥에 무기징역 처해진 인생이 기뻐봤자 얼마나 기쁠 것이며, 행복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본들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게 바로 환난의 본질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서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육신으로 인한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어야 하지만 오히려 그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과 같이 수고하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가 없는 자들로부터 죄인이 되어 끌려가고 더 수고하고 종과 같이 살게 되는 그것이 진정한 환난이고 고난이며 성경이 기뻐하라고 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 고난의 내용을 보면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육신으로 사는 세상의 모든 자들과 심지어 까다로운 자들에게까지 순복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한 순간에 겪는 곤고함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정체성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매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삶이 예수님과 같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압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인생 자체가 평안해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문을 받아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축구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축구하는 동안은 숨이 차고 힘이 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가 풍성한 사람이라고 이 육신의 삶이 고난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는 거듭난 생명이라면 육신에 대한 안목이 달라지기에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차별이나 야유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단편적인 삶의 사건도 아닙니다. 이는 전혀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에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세상에서는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삶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난을 이야기하고 말하면 알아들으려면 당연히 거듭난 생명이 있고 세상과 육신 가진 인생을 보는 안목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세상에 순종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며 정당을 만들기도 하고 또 그와 반대적 성향으로 진보적으로 세상을 개혁하고자 외치며 강연하고 SNS에 다니며 의견을 피력하는 것과 같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목적이야 어떻든 그 정체성은 거듭남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세상 전반을 볼 때 하나님이 다스리시기에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보고도 절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뜻하신 대로 온전히 다스리는 것을 아는 생명으로 났는데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순종하는 것은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해야겠다고 살다가 어떤 사건을 만났을 때 마음을 그렇게 먹고 시도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초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설교나 하고 다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존재가 거듭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졌음에도 이 세상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순종이 육신의 수고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니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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