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인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사도신경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이데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한 것이라고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차비를 대신 내어 주듯이 죄는 우리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과 같이 안다는 것입니다. <행위는 사람, 형벌은 예수님>이라는 구조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의 구조는 큰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대속했는데 왜 우리는 오늘도 기도할 때 회개부터 해야 한다고 하고, 또 예수님께서 모든 고난을 받으셨는데 우리의 삶은 왜 오늘도 고달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이 의문에 대한 모든 답은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정의 내리고 오늘도 내일도 또 노력만 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모호한 문제 앞에 서면 근원부터 새롭게 시작해보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괜찮은 방법인데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대신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는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정시켜놓고 다른 대안들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의 근간, 곧 출발에서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블로그에서 늘 설명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깨닫고 그 깨달은 정체성을 자신의 운명으로 또 하나님의 정체성과 자신의 관계로 순종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What to do?’)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행위를 기반으로 생각하기에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아닌가를 늘 염려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죄는 곧 행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가 죄가 되는지를 논하는 것이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거나, 주일날 짜장면 사 먹는다는 것과 같은 행위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우리 육신은 세상에 규정된 어떤 행위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늘 죄에 대한 문제의 굴레를 벗기 힘든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되지도 않을 일을 시키셨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는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라는 생각 정도는 해야 이성적인 것입니다. 안 되는 상황 앞에서 능치 못할 것 없다고 덤비는 것이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럴 값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왔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는 우리에게 있어 죄의 문제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일러 주신 것입니다. 즉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존재의 문제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존재에 관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시니 그 아들도 당연히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의로 여기시는 분이시니 십자가가 행위의 사건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행위로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와 뜻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오늘 우리의 고난이기도 한 것입니다. 괜히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의 모든 것이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사람들은 ‘그러면 오늘 우리가 육신으로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도무지 그런 머리는 누가 주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안목으로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알지만 참 한심한 일이기도 합니다. 앞서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육신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고 A4 한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설명을 했음에도 그런 사람이 꼭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 고난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너도 가서 십자가 하나 만들어서 지고 따라 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육신과 그 삶인 것입니다. 그것을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보이시고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셨다고 전하는 고난은 바로 우리 육신이 살아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생만 한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몇 개의 포스트에서 우리의 고난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려고 하면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할 때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주장하는데 그 주장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올하고 주장 하는 것 앞에 섰을 때 그 앞에서 죄인이 되고 종이 되고 수고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주장에 따라 자기 육신으로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의를 주장할 때에 예수님은 그 육신으로 그들의 주장에 죄인이 되어 그 육신을 십자가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고난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의를 주장하는 자들 앞에서 세상을 지은 하나님의 의를 가졌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수고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을 따라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법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서 순종할 법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법이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의미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예수님이 보이신 고난이고 또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 이 고난은 아름다운 것임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