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3:8-22) 선한 행실의 삶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4. 28. 09:4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세계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 곧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이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이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의 의의 차이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견해 차이입니다. 그 차이는 다름 아닌 바로 사람에 대한 견해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가진 인생을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이루기에 좋다고 보시는 반면 사람들은 사람이 가진 이 육신의 모습과 특히 행실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고 보는 차이입니다.


이 차이는 바로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발생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보인 가장 처음 반응이 바로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벗은 것이 부끄럽다고 했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서 옷을 벗어 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분명하게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악과가 육신을 가진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견해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선악과는 하나님이 사람이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아담(하와)은 먹음직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건방지게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에 질투를 느껴서 벌을 내리셨을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사태는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선악과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 좋을 대로 먹었더니 육신을 가진 인생에 대하여도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갈등은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한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악한 것인지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보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선과 악에 대하여 가늠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당장 육신을 가진 자기 자신이 부끄럽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사람은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니 부끄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담이 선악과를 볼 때 선악과에 대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 곧 내용을 보지 않고 겉모양을 보고서 보암직하고 먹음직도 하여 먹었다고 했습니다. 즉 사람은 겉모양, 육신이라는 형식을 본질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에 대한 판단도 형식을 본질로, 기반으로 하여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정체성 자체가 형식이 아닌 의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형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정체성은 형식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형식이 아닌 내용, 곧 ‘의’이시니 사람을 보실 때고 겉모습이나 행동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과 심령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도 사람과 같이 어떤 행동인지에 있지 않습니다. 행동을 보고서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이 되어 그 말씀을 전하는 사도와 같은 사람들 역시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선과 악이 사람의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동이란 모름지기 독립된 것이 아닙니다. 행동은 안에 있는 생각과 본능이 발현된 것입니다. 따라서 행동을 바꾸고 싶다면 사람 안에 있는 의와 본성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늑대가 양과 같이 풀을 먹고 살고 싶다고 풀만 먹으려고 한다면 되지도 않겠지만 그렇게 하면 영양부족으로 죽을 것입니다. 만약 늑대가 풀을 먹고 싶다면 양과 같은 초식동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지 행동이나 습관을 바꾸어서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성경에 나오는 대로 행하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말씀이니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성경대로 살 수 있는 기본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생명의 세계이므로 단순히 말 몇 마디나 생각이나 다니지 않던 교회에 다니는 생활로 습관을 바꾼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즉 거듭난 생명이 되고,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함을 행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행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본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심을 믿는다면 그 선하심이 자기 본성이 되기만 하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선함이 자신의 삶이 될 것입니다. 삶과 행동은 본성의 산물이니 그것 하나면 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려면 거듭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거듭난다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과 같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으로 났으니 사람에 대한 관점도 하나님과 같을 것이고, 무엇을 선으로 여길지, 무엇을 악한 것으로 여길지도 하나님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야말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도 하나님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것은 곧 행위를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 심령이 거듭났듯 속 심령을 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령으로부터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 나온다면 생명을 사랑할 것입니다. 자신이 생명으로 거듭났으니 생명을 사랑하는 것은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본성이 되었을 테니.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혀가 말하는 모든 것은 생명과 생각과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니 속 심령이 하나님의 본성이 되었다면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같은 맥락을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분쟁의 자리에 가도 화평을 구할 것입니다. 그 본성이 화평의 하나님의 의로 난 생명이니.


그렇다면 그는 늘 하나님의 눈이 향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것을 귀 기울여 들을 것이며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생명을 가졌고, 그 생명을 인하여 말하고 간구하는데 들으시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간구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정체성이 같아야 하는 것이지 자동차 엔진이 뜨겁다고 기름인 엔진오일이 아닌 찬물을 구한다고 요구를 들어줄 수 없듯, 하나님의 생명을 속사람의 내용으로 삼으라고 지은 사람이 겉모습에 관한 것을 구하는 것을 간구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려면 하나님의 본성과 정체성에 맞게 구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려면 하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기본이고 우선인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서 선한 행동을 한답시고 세상의 도덕에 기반을 둔 행동이나 성경에 이러저러하라고 된 문자 그대로 자기 행동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 노릇이고 회칠하는 것이며 외식하는 것이며 행함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므로 한 마디고 다 헛수고입니다. 아니 본질적으로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이 그것 하라고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것이 아닌데 자리를 벗어나 그러고 있다면 제 아무리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행하고 혀를 제어하고 성경을 지켜 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행위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본성으로 거듭나는 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선과 행실에 관한 모든 것 역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그렇게 본성이 하나님의 생명, 곧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그런 권면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이 온전한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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