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3장에는 아주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노아 홍수 때에 불순종한 사람들이 있는 옥에 가서 영으로 전하셨다는 말씀입니다.(벧전 3:19-20)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부활하기 까지 3일의 시간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경을 본다면 예수님 이후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없이 지옥에 간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가 또 문제가 됩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로마서(1:19-20)에서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지옥에 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어긴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윤회설을 주장하고 싶지 않다면 패자 부활전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듯 성경에서 아주 어려운 부분을 만났을 때 이런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그런 부분은 실제로 우리가 알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것은 먼저 그것을 기록한 사도들이 상당한 영적 단계에서 체험적인 것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는 당연히 그 장성한 부분에 이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단지 성경을 공부하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의존하여 억지로 알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공부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기록한 사도의 영적 장성함에까지 영이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 없이 공부해서 영적 세계가 깊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학교에 있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생각입니다. 만인을 위한 복음이 공부해야 깨달아진다고 여기는 것은 공부한 사람만을 위한 복음으로 차별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구분 없이 주신 것을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 구분하는 것이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장이 없는 존재들의 향연입니다. 공부해서 영이 자란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생명의 법이 아니라 가공과 제조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공부해서 성경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려고 하는 이유는 성경의 모든 것을 지켜야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고 실재로 성경은 그 말씀하시는 바를 다 지켜 행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 다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문자 그대로 지키라고 쓴 것이 아닙니다. 심청전을 효도하려면 바다에 빠져야 한다고 쓴 책이라고 여긴다면 몰라도.


성경은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bone)으로 온전합니다. 그리고는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살아감에 있어 장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걷는 것은 고사하고 목도 가누지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온전합니다. 법적으로 주민번호를 받아 법인이 됩니다. 선거권과 같은 것은 인간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역할에 관한 것일 뿐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진정으로 거듭남을 생명의 사건으로 본다면, 다시 말해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난 생명의 온전함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장성한다는 것의 의미도 압니다.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그 삶의 영역일 넓어짐과 같이 살면서 마주하는 일들을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대하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이 장성함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거듭나지 않은 것이 아님도 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관점을 가지면 성경을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반대로 또 성경을 모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압니다. 성경을 보면서 어떤 문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성경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고, 성경의 말씀대로 행동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목욕하지 않은 것인지,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인지 안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3장)


반면에 성경의 작은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성경을 다 어긴 것으로 여기지는 사람이나, 성경의 문구 하나가 이해되지 않으면 성경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이게 목욕을 하지 않은 것인지 발을 씻지 않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대충 아라고 대충 지켜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명은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 자기 안에 답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도 매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지키고 아는 것에 있어 성공과 실패 모두를 돌아봄에 있어 그리스도의 본성과 그 생명의 관점에서 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으로 사는 모습인 것입니다. 생명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다 생명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다 사람으로서 그것을 대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하거나 조성했다고 개가 되는 것이 아니듯,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어떤 일들이 때로 성경적이지 못하였다고 거듭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경적이지 못했던 것을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목욕한 자로서 발을 씻는 일이 되겠지만,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해도 육신으로 그것을 지켜야 온전한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지켜내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성경을 지켰어도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율법을 잘 지켰다고 말한 사람과 같이.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에 이 생명의 관점을 가진 자가 된다면, 즉 거듭난 생명으로서 성경을 대한다면 성경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자람에 따라 또 시절을 좇아서 과실이 맺힘과 같이 어떤 부분들은 어느 때에 이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관점을 가졌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적인 것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여야 성경을 아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온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청전을 읽고 인당수가 어딘지 모르고, 육지에서 얼마나 떨어져서 바다에 빠져야 하는지 몰라도 효도를 하면 온전한 것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른 사도들이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베드로전서 3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는 영적 세계에 예수님께서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서두에 언급했듯이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관념이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기적으로 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전할 때까지야 예수님이 가서 전했다고 쳐도 그 다음에 죽은 사람은 또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그때는 다르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안목은 직접 예수님을 대면해야 하는 것이니 동양이나 아시아 그리고 인디언들과 같은 사람들의 문제는 또 어떻게 할 것인지 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적 맥락을 알고서 봐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때로 대하고 있는 성경의 직접적인 내용을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해도 시절을 따라, 또 자기 영혼의 장성함을 따라 알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본질적 맥락에서 보면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만 온전히 자기 이야기가 되어도 성경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생명이란 생명의 어느 부분에서 채취한 세포라도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듯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육체로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사셨으며 그 영으로 <옥>에 갇힌 자들에게 전파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려워보여도 심청전은 그 내용이 전개되는 내내 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본질이듯 성경이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본질적 맥락에서 보면 됩니다. 성경은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본질적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것을 본질적 맥락으로 삼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옥을 단순하게 파편적으로 지옥으로만 보면 아주 어렵지만 옥이라는 것은 구속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드라마의 대사처럼 그냥 성실한 무기수와 같이 구속된 삶입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사실 지옥이나 감옥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옥이란 바로 구속이란 개념이 형식화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옥에 갇혔다는 것은 바로 인생이 구속되어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죄에 빠져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옥에 갇힌 듯 산 사람은 죽어서도 살던 것과 같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 그들이 구속된 곳은 다름이 아니라 방주를 예비하지 않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방주를 예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섞이는 것에 대하여 구분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좋은 것이 뒤섞인 것을 인생의 존재 갈증을 해갈하는 물이라면 마셔대는 세상의 가치관에서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방주를 예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옥에 갇힌 것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은 자의 정체입니다.


또한 노아의 홍수 때에 사람들이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보고 비웃었는데 그렇게 방주를 비난하는 안목의 자리가 바로 옥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노아를 비웃은 것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육신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본질로 여기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옥에 갇친 것이고 죽은 자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식만 본질로 알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셔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즉 육신은 도구라는 것을 보이시고 영이 본질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이셨다는 것이 바로 죽은 자들에게 영으로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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