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고난을 바로 안다면, 즉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기에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애매한 고난을 받는 삶을 살고 있다면 죄가 없는 삶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본다면 죄가 없는 사람의 고난이라야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고난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늘 자신의 죄사함에 대하여 확신이 없어 회개하고 있다면 베드로 사도가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그냥 자기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엄격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도 있고 죄도 있다고들 생각하는데 베드로 사도뿐 아니라 성경은 아주 단호합니다. 죄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어 보입니다. 이는 바로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의 차이로 인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는 사람들은 육신의 행위로 지은 죄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로 보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생명으로 아는 이들은 자기 안에 의가 무엇인지,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지가 하나님이 보시는 죄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는 사람은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가 없는 것이라고 해도 믿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 늘 주저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냥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니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앞으로 우리가 지을 죄까지 다 사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역설입니다. 어떤 죄를 지을 것인지를 알고 그것을 사할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죄를 짓지 않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죄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사람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하나님이 보실 때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육신으로 지은 죄들, 교통 법규를 어기고, 욕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묻겠지만, 교통 신호를 어긴 것은 행위로 지은 죄고, 행위를 본질로 보는 세계에서는 범칙금이라는 벌이 있으니 그것으로 갚으면 됩니다. 세상의 법률을 어겼다면 그 법에 따라 처분을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사실 세상의 법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간혹 우리는 교회업에 종사하는 몰지각한 이들이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범처럼 세상에서 죄(사회적 비난 받을 일을 포함)를 지어 놓고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세상의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또 어이없는 반문을 하는데 예수만 믿으면 세상에서 죄 짓고 벌만 받으면 되니 죄를 마구 지어도 되느냐는 식의 반문을 합니다. 대학교수들조차. 그런 질문을 하는 이들은 참 답답합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본성으로 산다는 것인데, 그 삶이 죄를 마구 짓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세상의 죄를 아무렇지 않게 범하고 다니는 본성이라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음과 어두움에 있다는 것은 자신들의 육신이 교회에 다니고 자신들의 행위가 성경보고 예배드리고 있으니 예수 믿는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위나 모습을 예수 믿는 것으로 여긴다는 그 자체가 이미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 사함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이 죄가 없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사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못합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알기에 다시 믿을 마음의 기회라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자기 죄에 대하여 밝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것은 그냥 자기 죄로 인한 고난이지 하나님의 의로 인한 고난이 아닙니다. 자기 삶의 정체성을 모르고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며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막막하기 때문에 인생이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서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장님이 책상에 부딪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자기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당연히 육신의 정욕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육신의 정욕은 육신이 가진 성욕이나 식욕이나 탐심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것 밖에 없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육신의 정욕은 육신 안에 있는 욕망과 본성이 아니라 육신을 본질로 보고서 그 육신이 평안해지려는 생각과 노력,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니 그것이 척도고 기준이며 소망이고 바람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도구로 형식으로 지으신 뜻을 벗어난 죄의 상태이고 목적을 상실한 것이기에 육신의 정욕이 늘 죄와 하나인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말할 때에 요한 사도는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함께 묶어서 이야기했습니다. 안목의 정욕이라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고서 그것을 바라는 욕망이고,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 역시 이생에서 얻는 영광과 평안과 부귀영화를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심과 같이 육신의 평안이나 영광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종교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은 육신이 가진 욕망을 억제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소진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그 모든 인생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고착화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에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해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하고 그 복을 받기 위해서는 성경이 명한 것을 지켜야하기에 내용들을 행위 규범으로 보게 되고 그것을 지키려고 육신으로 노력하지만 육신이라는 것이 자기 마음 같지 않고 의도한 바와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육신의 정욕이라며 제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육신이 가진 본성과 씨름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기에 끊임없이 자기 육신과 겨루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끊임없고 끝나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는 지켰지만 이내 또 다른 것과 마주하고 또 다른 것을 이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육신의 정욕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받으신 고난의 갑옷을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육신의 정욕을 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이라는 문제와 구분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매일 눈만 뜨면 자기 육신 안에 있는 욕망을 이기려고 하나님께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바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자신이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즉 오늘도 육신의 정욕을 이기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죄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런 인생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무 소용이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신부나 수녀 그리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한답시고 앉아 있는 대부분의 인생들이나, 기도할 때 마다 자기 육신의 정욕을 돌아보고 그것을 회개하고 앉아 있는 인생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들이며,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육신의 고통을 인한 갑옷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육신의 정욕을 이겨낸 자들, 예수님의 고난을 인하여 자기 죄가 그친 사람들은 이제 육신의 정욕이라는 말과 씨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함께 두신 자기 육신 안에 있는 본성을 자가 면역 질환(몸 안의 면역 체계가 자기 몸을 스스로 공격하는 병)과 같이 매일 그것과 싸우고, 그 싸움을 마귀와의 싸움이라며 돈키호테 같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육신 안에 있는 본성을 포함한 육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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