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들 중에서 성경을 더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것에 대한 탐구심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자유 의지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사람이 가진 자유로운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상이할 수 있는데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왜 허락하셨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바로 자유 의지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게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몰라서 어쩔 줄 몰라 가지는 의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바른 접근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택하지 않은 인생을 인지하고 나서 보니 많은 것을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들이 가지는 의미도 모르겠고, 또 그렇게 자유를 행사해 봐도 딱히 뭔가 잘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에 왜 스스로 자유하게 했는지에 대한 원망을 하나님께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행하고 싶은 바람이나 또 그 결과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과 너무 다르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면서 왜 사람이 자기 맘대로 하나님의 의를 벗어난 선택들을 할 수 있게 했는지에 대하여 궁금하고 원망하는 것이 바로 자유 의지에 대한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자유도 인생을 선택하지 않은 입장에서 그 인생에게 주어진 것이니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것은 인생의 의미나 한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사람을 로봇이나 아바타와 같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의지와 자유를 주셨습니다. 어디까지가 자유고 의지인지를 논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그 크기와 무관하게 사람에게 그것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종은 상극인 듯한데 자유로 오히려 종이 된다는 것은 이상한 표현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서는 어떨 때는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의 종이라고도 말합니다. 아들은 자유인일 뿐 아니라 상속자고, 종은 자유 없이 매인 몸인데 한 사람이 두 가지 상반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문제는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면 간단한 것입니다. 자유도 어디까지나 존재하니 주어졌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지 죽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유의 의미와 자유의 정체성과 범위 또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그 바탕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존재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존재에 귀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있어 당연히 그 답을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을 예수님께서 보이셨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신앙인들은 예수님과 같이 되고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빌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얻고자 하고 있지만) 예수님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주인이시니 이 세상에서 뭇하실 것 없는 자유를 가지신 분인데 그 자유함으로 세상에 군림하듯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분입니다. 자유로 종이 되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기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쉬운 말로 자기 원하는 것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루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으로 채색하기에 너무 좋기에 그 매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하니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부유한 자리에 오르고 싶은 자기 욕망을 그 자리에 앉힙니다. 그런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 종이 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낮아지는 자리를 보이셨습니다. 괜스레 겸손을 떠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주인이고 의로우며 무엇 하나 종이나 죄인이 될 것이 없는 점과 흠이 없는 분인데 그 모든 것을 가진 신분과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당연히 그런 길을 따라 가야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많은 교회가 건물도 화려하게 지어 놓고서 그 안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그것이 가난과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예수님이 그것을 도우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성경을 알고 세상을 알며 하나님의 의를 알게 되면 상대적이든 절대적이든 더 가졌다는 것은 가진 것에 대하여 가지지 않은 이의 종이 되고, 가진 것으로 인한 자유로움을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하여 사용하는 종과 같은 자리로 가는 것이 가진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없는 가짐을 가지고 그 가진 것을 나누고 전하기 위하여 가지지 못한 자들의 주장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라고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그 목적을 알면 우리에게 있는 자유를 어디에 쓸 것인지도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구속, 자기 원대로 되지 않는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로 여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존재와 함께 주어진 자유, 그 자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존재의 이유를 자기 삶의 정체성으로 순종하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온전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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