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이라는 말은 그 말이 통용되는 세계의 가치관과 의에 의하여 정의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서로 적대시하는 두 나라가 있다면 둘 다 적대국에 피해를 입히는 행동이 자국에서는 선한 일로, 적국에서는 아주 악한 일로 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이라는 것을 안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한 행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행실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함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은 생명이 다르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청년이 생각하는 선함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함이 다른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 어리석음과 지혜로움도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거룩하다고 하시는 것은 그런 것을 구분할 수 있을 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지속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은 세상의 선함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는 선함과 다릅니다. 물론 그 표현된 모양의 상당수는 같은 모양, 같은 행실로 나타나서 큰 차이가 없지만 근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간첩이 교통신호를 잘 지키는 것과 일반 국민이 잘 지키는 것은 그 모양은 같으나 근본과 정체성 그리고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간첩은 테러와 같은 일을 성사시키기 전에 경찰의 눈에 띠지 않기 위하여 법을 지키고, 국민들은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방향이 반대지만 모양은 같은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에서 기도하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는 행동이야 선한 행동임을 부인할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기도하는 목적이 육신의 문제와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얻기 위한 기도가 있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구하므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에 자기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더 사용하기 바라는 것을 구하는 것은 육신의 행위의 모양은 같으나 방향은 완전히 반대인 것입니다.


즉 선한 행실은 행위의 모양에 따라 선함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 목적에 따라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생을 지었다는 것은 정말로 알고 믿으며 그것이 감사한 사람은 그 행실의 모양이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여기시지만, 하나님을 빌어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제 아무리 선한 행실을 해도 그 목적이 금도끼 은도끼를 노리는 나쁜 나무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은 그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실의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전하고 의로우나 세상이 악하다고 말하니 자기 육신을 그들의 주장하고 요구하는 대로 십자에게 육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본성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모든 행실이 하나님 앞에서 선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으로 나타나니 말 그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다 선하고 하나님께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입니다.


이렇듯 선한 행실을 보일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보이신 모습과 같이 육신을 보전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성공하기 바라는 육신의 정욕을 좋고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알고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소비해가며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선한 행실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주관하심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선한 행실은 당연히 세상의 모든 것에 순종합니다. 세상에 순종할 때에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납니다. 이는 그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고의적으로나 의도적으로 세상의 어리석음 앞에 자신을 나서듯 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잔을 피하고 싶어 하셨지만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이끄는 대로 하나님의 뜻에 본능적으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즉 세상의 권력과 제도에 순종하셨기에 하나님의 아들 됨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 곧 형상이 드러나는 것은 세상의 제도와 세상이 가진 가치와 의에 순종할 때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잔잔케 했을 때 사람들은 ‘저가 누구이기에?’라고 했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한 것이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밥 퍼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한 행실은 행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속 심령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행실이 어떠하냐에 따라 선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심령이 행동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심령이 선한 사람은 그 행동이 하나같이 모두 선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보고도 절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 선한 행실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말을 막을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그 육신의 모든 행위가 선할 것이라고 말하면 정말로 약속이나 한 듯 반문하는 것이 ‘그러면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도둑질을 해도 되냐?’고 묻습니다. 그런 반문을 들을 때 마다 ‘어떻게 저렇게 시대와 사람이 변해도 똑같이 어리석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의가 심령에 본성으로 있어 그것이 육신으로 표현되는데 도둑질을 한다면 그것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이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럼 하나님의 본성이 도적질이나 시킨다는 말입니까? 그런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모독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척하고, 신앙의 문제에 질문을 던지는 위치에 있으니 그 모습이야 말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며, 어리석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 사도의 때나 지금이나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은 항상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나타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어리석고 포악함이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드러나게 했듯이. 그 어리석음, 선한 행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그렇기에 행동 자체의 선함을 판단하는 이들의 판단이 만든 제도와 법과 의로움을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행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딱 가룟 유다의 일이 그것인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을 향해 선함을 외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많은 사도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안다면 세상을 뒤집으려 할 것이 아니라 그런 노력들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되어 그 육신의 수고로움과 육신을 종과 내어주는 순종으로 그 모든 어리석음을 바로 잡을 것임을 알지 못하기에 정치 문제에, 사회 문제에 뛰어 드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다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바뀌면 다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들 안에 있으면 다 되는 것인데, 겉만 보니 사람이 아닌 제도의 문제로 보고 그것을 바꾸자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하지만 성경대로 바꾸자고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 달리 현실과 형식과 나타난 것을 보는 안목으로 어떤 것을 해도 다 하나님께 반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성경을 들이대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세상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문제라 여깁니다. 그럴 값이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다고 하거나,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실수 천지고 능력이 모자란다고 할 것인데, 오히려 교회에 가서 전능하신 주님이라고,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만들었다고 떠들고 찬양하는 외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온전하게 다스리심을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안목에 세상은 언제나 온전합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으신 곳이니 사람들 보기에 세상 꼴이 어떻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으면 온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목적이고 목적대로 돌아가도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이렇게 볼 수 있을 때 세상의 제도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안목을 가진 생명으로 거듭나야만 그렇게 볼 수 있고, 그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 때 선한 행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살면 삶의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선한 행실로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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