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11-12) 하나님의 영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3. 9. 09:40 Writer : 김홍덕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일의 결실을 얻어 미디어의 인터뷰라도 받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세상에서 얻은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겸손한 고백인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렇듯 세상에서 얻은 영광을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신다면 하나님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분이 될 것입니다. 그야 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영광스럽게 여기시고 그것을 받기 원하신다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초라하게 돌아가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세상이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이루진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저주한 사형수의 형틀에서 죽었는데 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세상의 추한 것은 다 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세상의 죄를 지셨기에 그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그것을 인정해준 대가로 구원과 성공을 주신다는 식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으로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삼성 최신 스마트폰을 사서 삼성그룹 회장에게 선물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삼성그룹의 회장이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럽다고 여기는 업적을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이루고서 자기가 보기에 그것이 영광스러우니 하나님께서도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라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공경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거짓이 넘쳐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것에 대하여 어떤 것도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여기는 영광>을 이루라고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것이 영광스럽기에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일 뿐 하나님은 그것을 전혀 영광스럽게 생각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런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는 인생들은 다 죄악 중에 죽은 자와 같이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셔서 세상을 살게 하신 이유가 그것이 아닌데 딴 짓을 하고 있으니 목적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동차가 굴러가지는 않고 번쩍 거리기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영광스럽게 된 것이지 하나님의 가치관과 목적이 영광스럽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영광스럽게 여기신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인간이라면 아니 만물이라면 누구나 놀라고 흠모할 만한 모습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은 그런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자꾸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지어 놓고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고, 목사들이 모여서 회장을 뽑아 놓고서 그것을 영광이라 말하며, 신앙을 학문으로 변질시킨 신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들고서 하나님께 영광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세상과 사탄이 바라고 바라는 바인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가 금전적으로 성적으로 타락한 것은 이 타락에 비할 바도 못됩니다. 교회의 근간인 자신들의 신앙하는 대상에 대한 정체성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육신이 바라는 바를 제어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본능을 공격하는 자가 면역 질환에 걸려 헤매지 말고, 우리 육신이 주인이 되어 육신이 속한 세상에서 성공이라 여기고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을 좇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혀 영광으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는 선한 일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방향이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성공으로 또 영광으로 여기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서는 죄로 여기고, 건축자가 볼 때 쓸모없어 보이며, 위로 가지 않고 낮아지는 자리로 가는 본성에서 비롯된 행실을 영광스럽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목적이 본성이 되어 있는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본성으로 인하여 하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무엇이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신 존재의 목적을 믿어야지, 우리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바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육신의 정욕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의 성공이 아닙니다. 큰 교회가 지어지는 것도 아니며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위로 올라가고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에 종교적 채색을 하나 것일 뿐입니다. 그게 회칠한 무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없는데 겉만 화려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면 크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뜻하신 일이 이루어졌을 때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사람에게 연약하고 일회성의 육신을 주신 뜻은 그 육신으로 살 동안 속 심령이 하나님이 살았다 하는 본성으로 거듭나서 그 본성에 의한 행실을 보일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기에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최고봉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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