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행실이라는 단어는 그리 어려운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숨기려고 해서 비밀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니 비밀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에 대한 기준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대한 선의 기준은 당연히 하나님의 기준인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선하다는 기준으로 선한 행실을 정의하기 때문에 어두운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영화 속에서 악당들이 자기들의 일을 잘한 동료나 부하에게 잘했다고 하거나 착하다고 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기준으로 볼 때 그런 것입니다. 그 세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선한 일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와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세계와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또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의한 선한 행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비밀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선의 기준은 다양합니다. 도덕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과 같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 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선한 행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은 아닙니다. 오히려 착하게 보이나 악한 행동입니다. 간첩이 선한 일 한다고 선한 일이 아니듯,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사람들이 성경을 기웃거리고 또 서로 협의하였다고 착한 행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은 선한 존재에게서 비롯될 때 선하게 보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존재는 그 존재의 정체성에 맞는 형식과 행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실이란 선한 존재에서 비롯된 행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대로 사는 존재입니다. 정확히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뜻하신 것은 자기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살아 있다고 여기시고, 그런 존재를 선한 존재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존재의 모든 행실을 선한 행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잘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성경에서 이를 지키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켜내는 방향성입니다.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행위로 지켜내려고 하는 것은 밖에서 안을 바꾸어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람의 육신도 안에서 밖으로 자라지 밖에서 당기거나 붙여서 자라는 것이 아니듯 생명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뜻으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가진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육신과 삶을 소비하는 것이 자기 존재의 의미라는 것을 순종하고 감사하는 존재가 바로 선한 존재입니다. 이는 육신을 소비하고 수고하느라 종과 같이 낮아지는 존재입니다. 앞서 설명한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속한 세계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는 육신의 정욕과 맞서는 것이고 방향이 반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행실이라는 것은 종과 같이 수고하고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로 사람을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감동시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사람에게 성경을 가지고 훈계하는 것이나, 설교로 사람을 가르치려들거나 심판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니 교회나 사람이나 이 비밀을 알아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는 성도들, 그들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예정하신 뜻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깨끗한 영혼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에 순종하는 속 심령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선한 행실을 당부한다는 것은 행위로 선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나,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라는 것이 아닌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 선한 행실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존재로서 그 존재의 본능과 행위를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이 선한 행위인 것이 바로 비밀입니다. 사람들은 더 알면 대접 받으려 합니다. 신학 공부 했다고 목사로 대우 받으려 하고, 설교를 많이 하면 더 많은 급여를 요구합니다. 언제부터 신앙이 학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백만 번을 물려 그것이 정당하다고 해도 선한 행실은 더 알기에 모르는 이들 앞에 죄인이 되고 모르는 이들이 자신의 삶을 보고 깨달을 수 있다고 육신의 수고를 기뻐하고 육신이 소비되는 것을 목적을 이루는 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더 가지면 그에 대한 대우를 받고 무엇보다 모르는 이들 위에서 가르치고 동냥하듯 던져주는 것을 선으로 여기고 당연한 것으로 아는 육체의 정욕에 속한 삶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세상보다 신앙 안에서 더 합니다. 자신이 기도 좀 더했다면 자기 말을 들으라고 하고, 성경에 대하여 더 알면 자기 말대로 하고, 심지어 자신이 더 알고 밝기에 자신은 이래도 된다고 맘대로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단 교주들이 그것을 자명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선한 행실, 깨끗한 영혼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예정된 삶은 더 가졌기에 그것을 육신으로 성실하게 나타냅니다. 그런 삶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끌려가기도 합니다.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모르는 이가 자신이 잘 안다며 주장하는 것을 수용하면 헛수고와 같은 수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육신이 평안해질수록 높고 복 받은 것이라 여기는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에 대우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신이 소비되지 않을수록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것이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한 행실을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라고만 압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한 책입니다. 설명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있는 사람의 삶이 이럴 것이라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설명한 내용이 십자가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종과 같이 발을 씻기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에 육신을 소비하고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없는데 종과 같이 살고 수고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안에 있어 그 깨끗하나 영혼이 본성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나는 삶은 작은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영광스럽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것 하나를 얻는 것 하나에도 육신의 소비는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육신을 가진 삶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한 행실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하나고, 또 하나는 더 알고 가질수록 말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수고하고 더 종이 되고 더 낮아지며, 무엇보다 육신이 더 수고하고 소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선한 행실의 비밀인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신이 더 평안해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 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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