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11-12) 선한 행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3. 3. 13:56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면서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간략하지만 사실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비밀들도 숨어 있습니다. 바로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어떤 의미인지까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앞서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은 육신의 본능이 아니라 육신의 세계를 본질로 보고 그 본질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본성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본성으로 하나님께서 표현하라고 한 하나님의 의는 표현하지 않고, 도구로 주신 육신을 목적으로 보고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것 그것이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그런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목적과 의가 바로 내용이고 본질이며, 그 본질로 인하여, 그 본질을 이루고 나타내는 도구로서 주신 것이 바로 육신이란 형식인 것입니다. 이 주객이 전도된 상태가 바로 육신의 정욕으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어지는 말씀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을 이방인들은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아들로서 사는 것을 이방인들은 악행이라 여긴다는 것입니다. 말이 금방은 이상해 보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생각하면 금방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선하게 여기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선하게 여기는 것의 기본은 높이 오를수록 선하고 정의로우며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나란하게 육신의 행위를 선하게 하는 것인데 이는 보기에 그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사람 안에 있는 속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면 그 의로움이 행위로 나타나는 법이 하나님의 의며 법인데, 사람들은 그와 반대로 하면서 의롭다고 여기기에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의미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 위로 올라가야 의롭고, 또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을 악하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향이 반대인 것을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낮아지고 실패자가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을 의롭고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꼴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인의 가치관입니다. 이 가치관은 지금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더욱 아쉽습니다. 교회에도 넘쳐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의 가치관, 이방인의 가치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위로 향한 그 가치관을 가진 이들에게 선한 행실을 보이므로 이방인들이 그 가던 길을 돌이켜서 뒤로 돌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게 하도록 하라고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듯 이방인들이 돌이킬 수 있는 선한 행실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더라도 베드로 사도가 제어하라고 말씀하시는 육신의 정욕은 성욕이나 욕망과 같은 인간이 가진 본성이 아니라, 육신이란 형식, 세상이라는 형식을 본질로 보고 그 본질을 영화롭게 보존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 그것을 추구하는 그 모든 시도와 바람과 욕망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그 육신의 정욕을 성도들이 제어하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 선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선과 악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기준입니다. 즉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가진 본성인 성욕이나 욕망이 악한 것이라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말 그대로 실수하신 것이고 잘못 만든 것이며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절대적 가치는 하나님께서 선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부딪히는 것이 있다면 이는 그 가치관의 오류이지 하나님께 ‘왜?’ 라고 물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 그리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악하게 여기는 사람을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악이 아니라 선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방향이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위로 올라가야 성공이라 여기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낮아지는 것을 성공과 영광으로 여기고, 겉을 변화시켜 속의 본성을 바꾸려 행위로 노력해야 한다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의 생명의 법은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세상과 반대를 향하는 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깨끗한 영혼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 깨끗함에 반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봐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육신의 정욕은 육신이 평안해지고 높아지며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대하여 반대로 행하므로 악하다 비난 받고 어리석다 조롱 받으며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게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이 선한 행실은 그 모양의 어떠함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행실을 어떤 이유로, 어떤 본성으로 인하여 나타내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본성, 곧 예수님께서 오셔서 전하시고 보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본성이 사람 안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선한 본성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모든 행실은 당연히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개가 ‘야옹~’할 수 없듯,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본성이 속에 있는 사람이 악한 행실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도 먹을 수 없고, 갈등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생명의 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과 그 본성대로 될 때 선한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 기준으로 선과 악이 구분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한 행실은 휴지 줍고 노숙자 밥 퍼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생명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이 표현되는 모든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본성이 표현되면 모든 것에 실수 없이 선한 것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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