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가 영혼을 거스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한 상대, 곧 수신자이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가 성도로 인정하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순종하므로 시작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피차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성도들을 일컬어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면 어떤 땅을 밟고 지나가고 있어 그 땅 위에 있지만 그 땅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형식이나 상태가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우리를 나그네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그네라는 것과 육신의 정욕은 어떤 관계일까?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들에게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앞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육신의 정욕이란 성욕이나 욕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부정하게 보는 것에서 비롯된 욕망입니다. 이는 육체의 정욕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육체가 바라는 것, 곧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요 껍데기가 바라는 것이 육체의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은 다 보이는 것인데 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히 11장) 우리 육신의 삶은 나그네와 같이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형식, 이 육신이 바라는 바 육신의 정욕은 이 세상을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인생들이 육신을 본질로 알고서 바라는 모든 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육신에 거하며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는 한 마디로 육신의 평안과 보존입니다. 신화, 영화, 만화와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바람의 하나입니다. 육신은 언제나 육신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신은 늘 육신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육신이 평안하면 성공이라 말하고, 신을 믿고 있으면 육신의 평안은 곧 신의 축복이라 여깁니다.


또한 사람들은 육신을 움직이지 않고서 무엇인가를 해 낼수록 능력자가 됩니다. 오랫동안 걷지 않고서 순간 이동을 하거나 날거나 바다 위나 물속으로 속히 갈 수 있으면 능력자며 영웅이 됩니다. 영웅 곧 메시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를 영웅으로 안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그것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면 신의 능력을 입은 사람이라고 숭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그 육신이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육신이 영원하고 평안하며 육신을 사용하지 않아도 뜻하는 것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이 내용을 바꾸려는 그릇된 의도입니다. 육신은 내용을 인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내용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소비되는 것이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을 주신, 육신 안에 있는 의를 위하여, 또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은 사용되고 소비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소비되어야 할 육신이 소비되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모든 것, 또 육신이 소비되지 않고 평안한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육신이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그네요 행인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나그네가 밟고 있는 땅이 자기 땅이 아니며, 자기와 의가 같은 나라가 아니듯 이 육신을 입고 있다고 육신의 바라는 바가 우리가 바라야 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바라는 바, 나그네가 그 지나는 땅의 주인과 같이 행세하려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란 그런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같이 신을 통하여 육신의 삶을 개선하고 육신이 평안해지고 성공하는 복을 받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을 바라고 빌며 기도하고 믿는 곳이 십자가 걸어 놓은 교회가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가서 육신의 복이나 세상의 성공과 같은 육신의 정욕을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도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정체성과 맞지 않기 때문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간혹 되는 것은 되지도 않는 것을 떼 쓸 정도의 열심을 인한 탓이거나, 하나님께서 아직 기회를 주셨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교회에 가서 육신의 정욕을 구하니 거룩한 것을 더럽게 하는 짓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육체의 정욕을 온전히 알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육신이 바라는 바를 기도하고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본능이 아니라 육신이라는 이 형식이 가진 것, 이 형식을 보존하고 돋보이게 하려는 그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나그네의 여정과 같이 본질이 아니기에 이것을 바라는 것과 늘 이겨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려면 이길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길 수밖에 없는 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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