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베드로 사도는 좀 실질적인 삶의 권면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분명한 안목이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성경이 권면하고 있는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물론 그 속 심령의 본성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의 본성이 삶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무관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 생명의 장성함에 따라서는 장성함에 이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이를 권면하는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우선 사람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어떤 존재로 보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람을 악하게 보는 사람들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사람이란 부정한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절제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계속 노력한다는 것인데, 노력한다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무엇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먼저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지음 받은 목적을 떠났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의와 뜻을 다시 보이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인생이 가진 원래의 존재 목적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즉 정체성이 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의 영혼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속 심령 곧 영혼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대로 회복된 영혼이라면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과 같이 온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만이 온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거역하고 대적한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에 대한 거역이고 대적인 것입니다. 사람 안에 있는 본성에 대한 대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본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또한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과 의가 없으면 우리의 육신을 부정하게 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의, 내용, 본질이 보이지 않는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 눈에는 세상의 가치관, 문자로 된 법과 같은 것이 본질로 보이게 되기 때문에 도덕과 세상의 법과 무엇보다 세상의 가치를 본질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법과 가치는 모두 육신의 잘못을 제어하는 것을 중심으로 되어 있고, 사람들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들은 사람들이 원래 가지지 못한 것이라서 투쟁해서 가져야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가지지 않는 자신을 패자로 죄인으로 부족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은 ‘금수저’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금수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의와 본성을 가진 것임에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성경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자신이 아직 가지지 못한 것, 또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는 것은 가지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이며 가지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하고 그렇게 되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으로 설명되는 관점을 가진 사람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을 육신이 가진 본성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성은 원래 가진 것인데 그 원래 상태로 보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없고,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도 없으니 그 본성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성은 다름 아니 그렇게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그 마음과 가치관과 안목인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기는 그 안목은 제법 심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볼 때 귀하게 여길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가지지 못한 사람의 모습, 가난한 목수의 아들 주제에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삶을 산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을 용서하지 못한 그 안목과 가치관이 바로 인생을 부정하게 보는 안목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의 부정함을 이기고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과 자신에게 없는 것을 취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가서 그것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란 것의 본질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인생이 가진 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 영혼과 싸우거나 부정하게 한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듯 우리의 본성 역시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출발이 잘못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싸우는 대상도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싸울 것은 우리 육신을 부정하게 보고, 육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져야하기에 없는 육신의 상황을 죄인으로 여기고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그 본성,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인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이 같이 붙어 있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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