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야기하는 ‘선한 행실’은 당연히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것이고 선한 행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선의 기준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고, 행동이 수반된다는 것은 살았다는 것인데 그 살았다는 것의 개념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이 의학적으로 살았다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목적하신 상태일 때 산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지 않는 시계를 죽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이여~’라고 불렀다고 혼났습니다. 우리가 누구나 다 선하다고 여기는 예수님을 선하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 선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은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는 것이냐? 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네가 어찌하여 무엇을 보고 선하다 악하다 말할 수 있는 기준을 가졌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숨은 아담을 찾은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 복제품인 사건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기준 위에 있습니다. 그 기준은 목적에서 비롯됩니다. 제조 공장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은 규격을 가지고 있어 그 규격에 따라 생산되고 검사가 이루어지는데 그 규격은 설계 때 규정됩니다. 설계는 바로 목적한 바를 구현하는 과정입니다. 그와 같이 기준은 언제나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을 만드신 목적,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목적하심과 의로 인하여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 만드심이 어떠한지는 우리가 다 압니다. 누구나 사람은 죽을 것이며, 누구나 생각하는 것을 따르지 못하는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전에도 또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일면 참 부족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사람이 이런 모습이어야 하나님의 목적이 달성된다고 설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값이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가진 큰 특징은 유한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입니다. 유한하다는 것은 1회용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소비재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하여 소비되기 위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소비재는 사용될수록 약해지고 보잘 것 없어집니다. 그게 육신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약해지는 것, 약하다는 것을 한 없이 감추고 극복하려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음에도 지으신 뜻과 반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소비하고 사용하라고 주신 육신을 보존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씁니다. 그래서 몸이 편할수록 복을 받은 인생이라고 여깁니다. 몸을 덜 사용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이른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악이라 하고 또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과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모습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가장 본질적인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라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들 삼으시려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표현할 형식으로 사용하라는 의미기 때문에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롬 8장) 


그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은 모든 인생의 본질적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그 모습이 자기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선한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한 모든 사람은 바로 육신의 정욕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들이신 분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 주었더니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모독한다며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순종하셨습니다. 내려올 능력이 있는데 사명감 때문에 참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그래서 그렇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들이란 정체성은, 분명 자신이 의인인데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악인이라고 심판하는 자들의 심판 앞에서 순종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함이라고 또 선한 행실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더 가진 자들 곧 어떤 세계의 의인들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자기 가진 것을 기준으로 높아져 있는 것에 교훈이 됩니다.


교회에 가면 성경에 대하여 더 안다는 사람들, 영적으로 더 밝다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말로 가르치고 신분을 앞세워 리더가 되려 합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사는 것에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대접받고 보존 받는 것에 자신이 더 가진 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의 행태가 그렇고 금식기도 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모습을 바로 육신의 정욕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한 행실이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자기 속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말씀을 자기 육신을 소비해가며 표현하는 삶을 살아서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서 자신을 반추하게 하고 돌이키게 하며, 그 모습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삶을 살아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소비해가는 것이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본성을 인하여 그렇게 하심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생명이 되었기에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게 되는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어리석은 자들과 체휼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억지와 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진정한 기쁨과 안식입니다. 존재가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 이상의 평안과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렇게 살아보지 못했으면 말이라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 빈 깡통이 요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능력을 압니다. 예레미야가 더 이상을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다고 한 것도 자기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심도 사명감이 아니라 생명이 이끄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같은 영이 있으니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억지로, 마음먹고, 사명감으로 하는 이들은 다 노릇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우리 육신 안에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육신을 소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한 의인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과 같이 더 가지고 더 의로운 자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그 육신을 수고하고 소비하므로 그 모습을 보는 이들이 수고하는 이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심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로 사람을 훈계하고, 자리와 권력으로 이끌려하고,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사람들이 추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