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받는 고난을 위로하고자 이 서신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성도들이 어떤 곤고한 일을 겪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고난은 앞서 이야기한 육신의 정욕과 선한 행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말씀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제도에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는 말씀 역시 상관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이 소비하라고 주신 이 육신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평안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육신의 정욕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주신 목적을 자기 삶의 의미로 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아 있고 생명 있는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생명이 있다고 여기시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육신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씀을 하고서 어떻게 보면 다소 난데없이 세상의 모든 제도, 그것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게 순종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난데없는 것이 아니라 이 순종이 바로 선한 행실을 나타내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연결이 보이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싹트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순종한다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것을 그렇게 보면 앞서 이야기한 <육신의 정욕>에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추구하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앞선 글과 앞에서 설명한 육신의 정욕은 세상의 평안을 말 그대로 추구하는 욕망이고, 세상에 순종한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순종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나의 의지와 뜻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듯, 세상의 모든 것도 그러하기 때문이며, 그 근원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순종과 세상에 대하여 크게 착각하고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 그러려고 노력하면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믿는다고 하겠지만 그렇게 믿는다면 세상 걱정은 왜 하며, 하나님께 세상이 타락했으니 바로 잡아달라고 기도는 왜 하는 것일까요? 온전하고 실수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뜻을 가지고 만드시고 경영하시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이들과 마귀와 사탄에 의하여 조정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물리쳐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사탄을 같은 체급으로 보는 시각으로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저라면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사탄과 싸워야 하는 체급으로 본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서 미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도구 중 하나일 뿐, 지가 뭐라고 하나님과 다툰단 말입니까?


세상이 공중 권세에 잡힌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았고, 세상에 사는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도 모르는 공중과 같이 정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목적도 모르고 자기 인생을 주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중 권세를 잡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에게 이 세상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 아주 감사한 세상이고, 실수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온전한 세상인 것입니다. 그로 볼 때 사탄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 그것이 바로 사탄이고 마귀인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세상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하나님의 세계이고, 육신의 정욕을 좇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선한 행실을 나타내는 사람이며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제도, 그것이 설사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아래 있다는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는 눈을 가졌다는 것은 그런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이 보이신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명분과 제도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것에 순종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빌라도도 또 대제사장과 유대인들도 다 하나님의 경륜 아래 있다는 것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으로 그들을 물리치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주신 생명(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니)은 크림톤나이트와 함께 있는 슈퍼맨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이 세상이 가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기에 그것을 극복하여 육신이 평안해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추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세상은 추구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지 순종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가 있기에 그 의를 가지고 세상을 심판하려 합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무례하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래야 한다면, 어떤 주장 하나,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주장 하나를 좇아 세상이 바뀌는 것이 옳은 것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잘못 경영하신 탓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추궁하고, 가진 능력으로 실수한 부분을 만회하라는 주장과 명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논리라면 예수님은 밑에서 조롱하는 이들의 말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세상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순종하셨습니다. 인간들이 가진 가치관으로 주장하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도 베드로 사도도 모두 세상의 권력이나 사람들이 만든 제도로 표현한 세상에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제도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는 촉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표현할 장이며,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할 도화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안목인데, 이 안목은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제어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 지은 목적이 자기 안에 있어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되어 선한 행실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사람의 생명이 주는 안목입니다.


이를 간략하게 말한다면, 이 세상이 순종할 대상으로 보이면 거듭난 사람이고, 교회에 가서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라 잡아달라고 떼쓰고, 때로는 정당을 만들거나 거리로 달려 나가 세상을 바로 잡자고 외치며 온전한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듭남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하나님이 온전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거짓된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온전한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이 온전하지 않고 바꾸어야 하며 순종이 아니라 정복해야 한다는 안목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며 지극히 교만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의에 반하여 거꾸로 가고, 하나님의 의와 뜻에 반하는 악한 세계인 것 같습니다. 사실 모든 형식과 모양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양을 가진 이 어이없을 것 같은 세상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마디가 자기 안에 열려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그것을 보는 안목 그 하나만 있으면 순종하고 십자가를 지고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온전한 세상이라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창세기 1장 1절도 지나지 못한 신앙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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