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각도에서 보면 베드로전서의 주제에서 살짝 벗어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번에는 순종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순종이 아니라 세상에 순종하는 것에 대하여 입니다. 물론 정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살았다 하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그것은 완전히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권면, 세상의 사람들이 만든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은 바울 사도도 몇 차례 했습니다. 그 중에서 로마서 13장의 말씀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의 모든 권세도 다 하나님께서 정한 것이기에 세상의 권세를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13:1-2)


하지만 성경의 전반적인 말씀의 표현들은 세상은 악하고, 세상의 권세는 마귀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세상은 경계하고 적대 시 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 뿐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하시니 세상의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은 세상의 제도와 권력의 부조리 혹은 권력의 바른 행사가 없거나 부족한 것이라 여겨 신앙을 가진 이들이 세상을 향하여 외쳐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못해 넘쳐 납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을 향하여 외쳤고, 또 심지어 그러다가 죽기까지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을 향해 외쳤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생각은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외식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것만 보이고 그 말씀의 본질은 보지 못해서 그런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안목으로 성경을 보고, 그렇게 본 성경에 선지자들이 세상을 향해 외치니 자기가 성경을 본 안목 그대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서 자신도 세상을 향해 그것을 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 곧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장(운동장, 배경, 캔버스)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 삶의 본질이요 정체성이며 목적이고 의미인 것이 순종된 심령을 가진 사람이 그 심령으로 살아갈 장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고 생명이 있다고 인정하시는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아야 세상을 순종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단순하게 대적하고 배척하며 가까이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기는 안목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을 볼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 속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길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거듭나지 않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진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으로 보는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만든 모든 제도에 순종하라고 하고, 또 세상의 권세는 어느 하나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세상은 기독교인에게 투쟁의 대상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순종의 대상인 것입니다.


세상에 순종한다는 것은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하라는 대로 하라는 것 역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그 속에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물에 던져진 생쥐가 그 상황을 세상으로 보고 순종하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쥐에게 생존 본능을 주셨으니 그 본능으로 살려고 헤엄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면서 가지신 뜻, 곧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타내려면 나타낼 곳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혼자 벽보고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시고 또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표현하신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과 경영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런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실수가 없다고 믿는다면 그의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알 수 없는 주장이고 논리인 것입니다. 게다가 행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잘못 경영하실까 걱정을 하며 기도하고 울부짖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마음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면 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 하나님께서 지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몰라보고서 자기들이 세운 의와 제도로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던 능력을 뒤로 하고 순순히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일진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오해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제도들,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좇아서 세상에서 추구하는 바를 의롭다 여겨서 만든 제도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순종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반하는 세상의 제도에 순종한다는 것은 세상의 의 앞에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이가 죄인이 된다는 것이고 종이 된다는 것인데, 이상하게 그렇게 살 때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알게 되었듯이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 아들의 성품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세상을 좇아 육신의 정욕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세상의 제도 그것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에 육신으로 수고하고 육신을 소비하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선한 행실이고 야고보 사도가 말씀한 믿음 있는 행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순종하지 않고 등지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수도원을 차리거나 수련원이나 공동생활 공간을 만들어서 믿는 이들만 모여 사는 것은 복음을 크게 잘못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고 종과 같이 되어 수고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낮아지는 것이고, 십자가의 도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며, 선한 행실이며, 행함 있는 믿음이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경영하심을 믿는 것이며, 우리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는 하나님 아들로 거듭난 삶의 본질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