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13-17) 자유로운 선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3. 18. 09:03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세상의 모든 제도 앞에 순종하라고 성도들에게 권면하면서 이를 자유와 관련지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롭지만 그 자유로 오히려 종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은 세상의 제도에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가졌지만 그 자유로 스스로 종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유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주어진 인생을 자신이 선택적으로 살 수 있는 권리로서 자유가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인생도 신앙도 자신이 삶의 목적이라고 판단한대로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흔히 말하는 <자유 의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철학이나 사회학이나 법학에서 말하는 자유에 대한 논리는 어디까지나 인생으로 난 자연인에 대한 관점입니다. 사람이 존재하고 스스로를 인식한 다음에 존재를 인식한 인생들이 자유를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는 존재하기 때문에 권리가 있고, 존재하는 인생에게는 예외 없이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쟁점은 존재한 인생에게 자유를 어떻게 줄 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유도 어디까지나 존재하여야만 논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다 근원적인 것은 왜 존재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존재하게 된 목적이 자유의 근간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교회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도 간단하게 이해가 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서로 논쟁하는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사람과 자유는 모두 존재 했을 때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자유를 이야기하고, 선악과를 먹는 것에 대한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허풍쟁이들의 수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문제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지 않고 아주 순종만하는 존재로 만드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왜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하고 또 거역할 수도 있도록 해 놓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선택을 했다고 화를 내고 심판을 하겠다고 하시는가의 문제가 바로 자유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것을 통칭하여 자유의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 이해를 돕기 위하여 남녀 간의 일에 상대가 자신을 감동시키는 일로 인하여 연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감동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연출되고 의도되고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음만 못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고, 사람이 가진 가치관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도 그러너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끊임없이 순종을 말씀하시는 것도 그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살 수 있고,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사람이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자기 인생을 순종하는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며 살게 하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에 의미를 두시지 않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인생을 주심에 있어 강제된 삶이나 인식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펼쳐 놓으시고 또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을 사람에게 주시고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므로 사람 지으신 뜻을 사람이 자기 운명으로 순종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무식한 이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신다고 할 수 있지만, 먼저는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지으신 뜻이 그것이고 법이 그것이라는 것을 순종하면 그것은 시험이 아니라 섭리가 될 것인데 이를 시험하는 것으로 아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또 하나는 사람도 의사가 수술한 환자의 경과가 의도된 대로 되는지 지켜보고, 엔지니어도 자신이 설계하고 수리한 제품이 의도한 대로 순종하는지를 보건만,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사람의 삶이 의도한 대로 보는 것이 어찌 시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이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섭리이고 감사의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자유, 곧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순종하거나 아니면 자기 맘대로 살거나 하는 선택에 까지 미치는 이 자유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좇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제도에 순종하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천군천사를 불러서 자신을 잡으러 온 병사들을 물리칠 수 있음에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그렇듯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바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하나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오히려 종의 삶을 사는 선택을 하게 하심입니다. 그런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이유이자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가 그렇듯 스스로 종이 되는 세계에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을 위함이라면 자유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자기에게 유익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이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옳다고 하면 자유로울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유 의지에 대한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갈등은 오히려 참 믿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선택의 결정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고 인생을 주셨다는 것이 감사한 사람은 스스로 종이 되는 것과 같은 선택을 할 것이지만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좇고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공급하시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존재라고 여긴 사람은 주신 자유로 오히려 종과 같이 되는 것이 못마땅할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신다고 하시고, 풍성하게 하신다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도 죽고자 하는 자가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알고 받으려면 바로 이렇게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귀하고 복된 것이듯, 사람 역시 자기 생각에 종과 같아 보일지 몰라도 원래 지음을 받은 목적의 자리가 그곳이면 그곳으로 가야 온전하고 복되며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평안과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한 결정에 대하여 자신이 결정할 때 가진 그 의도 안에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더욱이 하나님 당신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만드셨는데 그것을 소홀히 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실 리는 없는데 사람은 단지 자기 생각이 우선이므로 종과 같아 보이면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인간의 자리는, 그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세계, 자유하나 그 자유로 종과 같이 되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스스로 선택했을 때 가치가 있기에 그 선택의 자유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했을 때 사람의 눈,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그것은 쓸모없고, 죽어야 하는 것이기에 십자가에 처형했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야 말로 산 것이기 때문에 다시 살리시니 그것이 바로 부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볼 때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며, 이 세상은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경영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믿고서 순종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 자유로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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