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 번째 서신 1장에서 성도들에게 문안하면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성령 그리고 거듭남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깊이 있는 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한 표현은 믿음 안에서 시련을 겪는 참 성도들(‘너희’라 할 수 있는)에게 문안하고 위로하는 것인 동시에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구원에 이르도록 자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갓난아이들이 젖을 갈망하듯이 하나님의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듯 간절하게 사모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먼저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뭔가 하라는 의미로 와 닿습니다. 이때까지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려 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과는 뭔가 상이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3절에서 주의 자비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속사람이 바뀌어 거듭나므로 그 거듭난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세계의 말씀입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먹고 마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거하면 성령께서 그 말씀을 잉태케 하셔서 생명이 되게 하시고 그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되면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 ‘~~하라’는 말씀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렇게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하나 단 하나의 계명조차도 평생을 온전히 지킨 사례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예에서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형제를 보고 라가라 하는 자마다 살인한 것이라는 말씀이 그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 그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이 가진 능력과 한계와 문제를 다 아실 텐데, 그런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키지 못할 것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단지 자신의 노력 부족이라 여기며 끊임없이 노력만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넓은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런 본성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건 우리에게 노력을 요하시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지를 본 사람들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곳에는 구원도 거듭남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젖, 곧 우리를 자라게 하는 신령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거듭 났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되지 않던 것이 이제는 되는 세계고, 이전에는 목숨을 걸 정도 가치를 부여하던 것이 이제는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젖, 곧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가 젖을 사모함과 같이 사모하고 먹고 그 맛(가치와 능력과 본성)을 알게 되면 지금 2장 1-2절에서 권면하고 있는 모든 말씀들과 같이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없는 생명과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거듭남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이 권면을 노력으로 지켜내려고 하는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역시 거듭남이나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권면대로 살아갈 본성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이 권면들을 지켜내며 살아갈 본성이 없다는 것은 이 말씀이 생명으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생명으로 거듭날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사람을 보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여길 것이 없는 죽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주일마다 또 예배 때 마다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있다고. 하지만 저는 반문할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고 성경을 읽는 것이 누구에게 유익이냐?’고. 사람들은 자기가 육신의 삶에서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습니다. 그게 말씀을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단지 자기 소원을 위하여 값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 거래의 값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값으로 성경을 읽고 성경을 지켜내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공로고 회 칠한 무덤과 같은 노릇입니다.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속과 겉이 다르니 또한 거짓된 것입니다.


그렇듯 자기 행위를 성경이 말하는 대로 단속하고 제어하려는 생각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한 탓입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한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의 삶이 바라는 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는 값을 치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 성경을 지켜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약하여 그러니 노력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넘쳐나는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없다면 그것을 양산하는 존재로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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