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맥락은 간결하고 굵직굵직합니다. 그 말씀들의 내용을 아마도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이 세상에서 어떤 모양, 어떤 처우, 어떤 정체성을 받게 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이런 세상 속에 살아가는 육신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런 모든 불의한 것을 버린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세상과 구분되는 삶의 경계를 정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구분이 된다는 것이 곧 거룩함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금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금하는 것은 노력하는 중에 어떤 때는 되고 어떤 때는 실패하는 그런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금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이 아직 노력하는 삶이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지 못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세상이 볼 때는 버린 돌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예수님도 그러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버린 돌이라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볼 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세상의 주요 성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한 세상을 그렇듯 경쟁에서 이겨내어야 선하고 의롭고 영광스런 존재가 되는 것인데,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하지 않는 것은 세상이 의로 여기는 경쟁을 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과 같이 성경이 금하는 것이나 또 마음으로 무엇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많습니다. 살을 빼기 위하여 음식을 줄이려고 하는 것, 공부하기 위하여 잠을 줄이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경험한 바와 같이 그런 것을 금하고 제어하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유일하다시피 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속사람 안에 이유가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본성은 경쟁하여 이겨 높은 곳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서로 시기하고 비방하고 없는데 있는 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진 본성입니다. 애굽의 피라미드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낮아져서 영광을 얻는 곳입니다. 그런 하나님 나라의 의가 자기 안에 있는데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 곧 세상과 다르게 낮아지는 법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경쟁의 이유가 없으므로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할 이유가 없으니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금하려 노력하거나 기도하거나 각오를 다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세상 사람들이 경쟁하여 성공하려는 마음 대신에 속 심령으로 자리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맛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몸으로 지켜내려면 우리 안에 그럴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성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그런 본성이 자리하려면 무언가가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의 유전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처녀가 노력한다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듯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들어오면 그것이 이 생명의 법에 의하여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 안에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경쟁할 이유가 없고 낮아지려는 마음이 본성이 되었는데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속심령이 바뀌면 사람들이 이를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본성으로 자리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눈에 띠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들어오는 주된 목적이고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자신들은 모두 위를 향하여 가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은 낮아지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니 이를 조롱하게 됩니다. 그리고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조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이미 가치가 없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자기들 맘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세상이 맘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십자가에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아 놓고서는 ‘그렇게 세상의 경쟁을 하지 않고 역방향으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럼 하나님의 아들이니 우리가 주는 형벌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건축자가 볼 때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아 보여서 하나님께서 성전의 모퉁이 돌로 쓸 돌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에 낮은 자리로 가려는 본성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피라미드의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의로운 것이고 영광스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인하여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그 본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면 그것을 자기 존재의 이유로 삼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원래 만든 목적대로이므로 온전하고 의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살게 됩니다.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려고 하게 됩니다. 낮아지려는 사람에게 악독과 궤휼과 외식이 있을 리 없고 시기와 비방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듯 이유가 없어지면 오히려 그러려고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흥미 없는 일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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