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자기 생명과 삶의 본성이 되었기에 그 본성을 육신으로 표현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방향이 반대입니다. 본성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과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다는 밖에서 안으로의 방향이니 완전한 반대인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성경을 대하는 관점의 차이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서 행하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성경을 매뉴얼로 아는 것이지만,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어 그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삶이 된 사람에게 성경은 자신의 일기와 같은 자기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이 블로그의 제목이 Bible become My Story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을 하면서 돌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돌은 곧 율법입니다. 산 돌이라는 것은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돌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산 돌이 아니라 버리는 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돌은 살아 있고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는 아주 좋은 돌인데 말입니다. 그 돌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입니다. 돌이 말씀이니 산 돌이라고 함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돌은 세상의 건축자, 곧 세상에서 이기고 이겨서 높은 곳에 이르고자 하는 이들이 볼 때는 전혀 쓸모없는 돌이자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겨서 높이 올라가야 의로운 것인데 낮아져야 한다고 하니 당연히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버린 돌을 성전의 주춧돌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이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건축자가 하나님이 보실 때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는 돌, 곧 말씀을 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기에 눈에 보이는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에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은 어떤 공로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지에 따라 신앙의 좋고 나쁨이 결정됩니다. 그런 가치관의 결정체가 바로 우리가 오늘날 교회에 가서 항상 듣는 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가치관을 지닌 사람에게 낮아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지 않는 것은 쓸모없기에 버려야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조롱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피라미드의 위로 가는 것이 옳다고 말할 때에 낮은 곳으로 가서 자기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느라 수고하고 종 되는 모습으로 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에서 날 수 없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저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는가?’ 싶은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들이 세상에서 조롱을 받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과 앞서 이야기한 비난은 전혀 다른 것인데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비난을 받는 것은 세상 사람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는 같은 파이를 두고서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두고서 사실 둘 다 동일하게 육신의 수고로 성공하려고 하는 것 까지 같은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더 선하게 경쟁하고 있다고 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성공으로 이끄시는 은혜를 베푼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에서도 늘 듣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성공해서 세상에서 잘 살게 되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서 교회로 온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좇고 있는 것이나 교회가 좇고 있는 것이 같은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얻을 것이며 세상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자신들도 교회에 올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밑장을 까고 보니 교회의 사람들이 늘 반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 일하러 갈 때 교회에 간다고 빠지고, 같이 술 먹자고 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합니다.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같이 놀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상 경건한 척 하지만 교회를 세습하고 또 목사가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세상이 간섭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니 욕을 먹는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장에 뛰어 들어서는 세금도 꼬박꼬박 내는데 세금마저 내지 않겠다고 하고, 교회가 세상적 기준에서 볼 때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하면 하나님의 일을 세상이 간섭하는 마귀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는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빌미로 각종 특혜를 스스로 누리려 하니 욕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룡점정으로 그런 비난을 세상이 하나님 아들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건축자, 곧 세상은 높은 곳이 성공이라는 세상이라는 건축자는 낮아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의인임에도 죄인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그 바보 같은 하나님 아들의 본성을 가진 사람을 볼 때 세상에서 도무지 성공할 수 없는 쓸모없는 돌로 여기기에 버리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것이 의로운 것이라며 스스로 그 자리로 가니 바보 같다고 비난하고, 그렇게 해서 세상을 이길 수 있겠느냐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하던 그 안목으로.


건축자의 버린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로 알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삶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바로 산 돌이자 세상의 건축자가 볼 때는 버려야 할 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한 사람 안에서 생명의 본성이 되어 그것이 표현되면 하나님의 아들이자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할 것으로 심판하는 그 심판을 받아서 십자가에 달리심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어이없는 것을 자기 운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 이르러야 성공하고 영광이며 의롭다고 여기는 건축자가 볼 때 그것은 어이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은 진정으로 산 돌이기에 죽음에 둘 수 없어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이고 그 부활이 바로 성전의 주춧돌이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본질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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