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은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그 편지의 수신자들이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나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이나 이방 신을 믿는 이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그들을 위로하면서 한편으로 그들에게 구언에 이르라, 푯대를 향하여 가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권면한 대상들은 로마 교회에 들어와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며 물을 흐린 자들이나, 골로새 교회에 가서 세상 학문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과 같은 이들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그런 자들을 위로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성도들에게 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했을까요? 바울 사도는 아직 잡은 줄로 생각지 않는다고까지 했을까요? 이것은 단지 신앙은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로 치부한다면 교회가 세례 문답 때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지 않을까요? 믿었으면 되었지, 그러면 구원을 받는 것이지,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정의가 사실 모호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다시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면서 실상은 늘 죄를 짓는 자신들의 모습이 상충되는 것에 대한 답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족의식 때에 손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구원을 받았더라고 일상 속에서 지은 죄는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점이 또 문제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일생일대의 목표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인데 여기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사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목적은 하나님을 빌어 세상에서 자기 하는 일과 자기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에 있습니다만) 


이러한 문제는 돌고 돕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처럼 이야기하기를 인간은 연약하니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고, 그래서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라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거룩하고 온전하라고 하셨다는 것이 또 문제가 됩니다.


다행히(?) 이런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어서 당연히 의문이 들고 해결하여야 하는 문제임도 시간을 끌 수 있고 각종 변명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는 아닙니다. 교회에 가서 조금만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진정한 믿음과 신앙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런 허술함은 곧장 들통이 납니다. 그래서 질문하면 돌아오는 답은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대답이나 하려고 몇 년간 신학을 하는 것도 아주 웃기지만 문제는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임에도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예외 없이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신앙으로 연결됩니다. 아니 사실 뿌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어 의롭게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구원과 죄의 문제에 있어 혼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받고 의로워졌는데 자기 육신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음을 보자니 혼돈스럽다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행위의 깨끗함이라 생각하는 탓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썩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 없는 사도들 서신의 수신자인 온전한 성도들에게 구원을 이루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구원은 반복적으로 이루어가는 사건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자기 구원의 확신에 금이 갈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결하고 알아야 할 중요한 신앙의 이슈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신앙의 근간이 무엇이냐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고 이 블로그 전체를 통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대로 행하지 못했던 죄를 용서받고 이제는 성경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이 육신을 가진 존재는 하나님의 의와 뜻과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에 그 만든 자리로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정체성의 문제이기에 그 정체성에 맞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나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사도들이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자들이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일에 관하여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있으려면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합니다. 결혼을 하면 아내의 몸속에 남편의 유전자가 들어가듯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가드신다는 표현을 하시고 우리를 신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과 전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눈과 귀를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는 씨가 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를 자신의 운명으로 잘 받아들이면 생명이 싹트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에 우리 안에 거하시려고, 우리의 본성이 되시려고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확실히 우리가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경을 보고서 자신의 존재 목적이 이 땅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ㄴ정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행위가 끼어들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나면 이제 그 생명이 육신을 통하여 표현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말씀하시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구원을 만들어 내거나 구원이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완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회복된 정체성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도 죄를 지으니 회개하면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웃기는 것이지.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행위에 대한 죄의식은 사람들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생각 위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하나님 믿으면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냐고 묻는 무식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속사람으로 있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령이 속사람으로 있는데 그것이 표현되니 죄가 되더라는 말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간간이 성경은 예수님과 같이 되는 행동 매뉴얼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살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설명한 책이라고 이 블로그에서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구원의 섭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체성이 속사람의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의 본성은 육신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생명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표현된 모습, 그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경을 보고서 그대로 행동해서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 곧 인생의 본질을 자신의 것으로 순종하면 그것이 삶으로 표현될 때 어떤 모습인지를 보이신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고서 자기 인생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 구원이고, 그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아가게 되므로 그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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