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가 ‘너희’라 말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물론 성경을 읽고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You라고 하는 사람 곧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이 된 사람은 하나님과 가치관이 같은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는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본질인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겠다는 사람 역시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과 다르게 살고 있는데 보호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런 사람들을 즉시 멸망에 처하지 않는 것은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기에 그 기회를 주고 계실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마치 경찰이 신변을 보호하듯, 또 은행이 보증하듯 지키는 것을 생각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험한 꼴 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교회에 잘 다니고 하나님께 세상에서 평안하기를 기도하는 것에 지장 없는 건강과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부자(눅 12:13-21)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지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게다가 초대교회의 많은 사도들이 순교를 당하는 험난한 삶도 대체로 보호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면 사람은 죽어도 된다는 식으로 방치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대적하는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이었음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은 육신의 복락과 안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TV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족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것과 유사합니다. 드라마 안에서 때로 많은 돈이 필요한 상황을 설정해 두고 가족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방법(예를 들면 결혼과 같은 거래)으로 돈이 충당되지만 결국 가정이 큰 갈등을 겪는 것을 묘사된 것을 보기도 합니다. 가족이 원하는 것은 서로의 관계에 대한 의미와 마음이지 돈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문제, 경제적인 것, 건강에 관한 것,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관한 것, 사업의 성공과 같은 것, 큰 교회를 짓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지키고자 하시는 유일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정체성, 그것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고, 나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관계, 그것 하나 만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거룩한 성령에 순종하므로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는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곧 ‘너희’이며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은 사람들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순종한 그 순종함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뿌림에 순종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되는 것이 자기의 존재 목적이 온전해 진다는 것을 고백하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우리 인생의 정체성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받으며, 그것을 보이신 예수님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셨으니 주님으로 모시는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관계를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는 일의 안위와, 가정과 가족의 평안과, 사업의 번창함을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삶을 지키시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육신 안에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서 지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피,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 지키는 것입니다. 보석이 들어 있지 않는 보석함을 지킬 이유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문안과 같은 사도들의 문안을 읽을 때 그 문안이 자신과 상관이 있는 문안인지부터 먼저 상고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보호하신다는 그 문구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낭비하시는 분이 아니시니 그 능력으로 보호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내 안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내 안에 있는지 그것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