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3-12) 시험과 기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1. 5. 17:26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 시험(Temptation)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가장 먼저 떠 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정체성을 보이시려 이 땅에 오셨으니 예수님의 시험은 곧 우리의 시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시험 역시 같은 것입니다.(예수님의 시험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 마태복음과 주기도문을 참조)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단지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마귀는 시험을 할 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기적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그런 것으로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고, 마지막으로 무엇을 경배할 것이냐에 관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본질로 볼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마귀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이런 시험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받으면 잠깐 근심하겠으나 곧 크게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어려운 관문을 이겨내었으니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먼저 시험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앞서 포스팅한 바와 같이 고난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먼저 시험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시험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시험, 곧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 받는 시험이지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사람들이 받는 시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이유가 바로 그것에 기인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시험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지칭하는 이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시험을 받을 것이지만 오히려 그 일로 크게 기뻐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시험을 받는다는 자체가 이미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만 받는 시험을 받으니 그 시험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뒤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들에게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시험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의 증거이고, 그럴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그 일로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일이 잘 풀려서 기뻐하는 것이 아닌, 자기 정체성으로 인하여 기뻐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쁜 사람이라는 것은 정체성 곧 존재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의 일과 육신의 평안에 관한 것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로 기쁘지 않습니다. 사는 형편과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자기 정체성이 회복된 것 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기쁨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소망이 그것에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고난이라는 것을 이야기 함에 있어 고난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원하는 바가 얻어지지 않는 것이나, 아니면 평안하게 또 성공한 삶을 살지 못하여 겪는 곤고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난은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자 살아가면서 육신이 소비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수고 없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가 그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육신을 초월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육신의 평안과 복락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는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전에 예수를 믿는 것이 위로는 되지만 만족이 되지 않는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주 길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 사람들보다 인생이 더 효율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일을 적게 해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괜찮을 것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사람이 육신으로 수고하지 않는데 어떻게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을 자기 인생의 운명으로 순종한 사람들도 육신을 가졌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하여 좀 더 평안하고 하는 일이 더 잘되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자신 뿐 아니라 세상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그런 것을 보이라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세상 사람보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사는 것이 어렵고 부족해 보이면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핍박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그런 마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키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라 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했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것을 보자 ‘저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활하신 예수님께 고백하고 인정하고 나니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일을 대신하는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이기에 기뻐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기쁨,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신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 일이 자기가 바라고 소망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되는 것을 소망하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기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하나님을 믿기에, 또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세상의 사람들과 달리 하는 일이 더 형통하고 세상에서 잘 나가게 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그런 일들에 기뻐하는 사람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듯이 시험을 받아서 기쁠 이유가 없고, 고난을 받아 기뻐할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시험과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바 세상에서 잘 되는 일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환난과 고난이 기쁜 일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실존을 증거하고 그 본성을 드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이 기쁨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될 때 시험과 고난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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