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이 베드로전서는 아무개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 이미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는 이들에게 그 은혜와 평강이 더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쓴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는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에 순종한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만남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불쌍한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 밖에서 방황하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를 발견하고 그 자리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순종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그 사람에게 은혜가 되고 그 은혜를 받은 이의 삶이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그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소망이 있게 한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소망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근거 없는 꿈과 같이 여기는 경향이 짙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이 이 땅에 살 동안 하나님의 의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천국에 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으로 섬겨서 육신의 복을 추구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답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근거 없는 소망의 표상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소망은 다 원인이 있는 소망입니다. 마치 경부선에 올려져 있는 기차가 부산에서 출발하면 서울에 갈 것이라고 소망하는 것과 같이 분명한 원인이 이루어지는 소망을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으려면 예수님의 부활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부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이 소망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 것이라고, 먹지 않아도 배부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육신이 사는 세상의 매커니즘에 기반을 둔 생각입니다. 그 생각의 기반인 육신이 바로 썩어 없어질 것이고, 다 쇠하여지는 세상에 기반을 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사고방식에 기반을 두고 소망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이후의 사건입니다. 즉 죽음이 없는 부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의 죽음과 다릅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은 자기 죄로 죽거니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죽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활 전의 죽음은 오직 예수님과 같은 죽음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의 소망만이 온전한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죽으신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와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야기했더니, 세상의 가치관을 가졌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며, 행위와 공로로 하나님께 의로워지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그들의 의로 예수님을 정죄하여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죽음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죽음이 없다면 당연히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라는 곳에 가서 들을 수 있는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죄는 우리가 짓고 예수님이 벌을 받아서 죽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행위로 지은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은 전적으로 행위 기반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죄사함 마저 육신의 행위에 관한 것으로 일갈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높은 곳으로 가야 영광이고 성공이라고 하나 예수님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도무지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몰골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시므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위가 경건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볼 때 어이가 없어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고, 그 죽음 이후예야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사람이라는 존재로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성공하는 것이 나의 본질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나는 항상 실패자라는 것이 인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주장하는 이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그런 죽임을 당해본 적이 없는데 부활의 소망을 꿈꾸는 것은 다 개꿈일 뿐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꿈꾸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긴 자가 되려고 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사람이 세상의 의로움을 주장할 때 자신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건 그게 아니고~’라며 반문하고 가르치려 하고, ‘나를 무시해?’라고 발끈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간 크게도 ‘내가 하나님 믿는 사람인데 무시해? 겁도 없이?’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은 다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 온 모습입니다. 부활을 맛 볼 수 있는 죽음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과 삶의 의를 가지고 있다면 부활의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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