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로전서 1:1-2) 하나님의 예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7. 12. 23. 09:03 Writer : 김홍덕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고 하면 구원을 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정하셨다는 말로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은 a man에 대한 정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the Man의 운명과 정체성 그리고 목적에 대하여 정하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미리 아심’도 foreknowledge(선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어떤 한 개인에 대하여 복을 받을 사람인지, 아니면 저주 받을 사람인지를 정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운명과 목적과 정체성을 가졌는지를 사람이 나기 이전에 정하시고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방송도 재방송 보면 재미가 없는데, 고양이가 쥐 잡아 먹기 전에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데 복도 주고 벌도 하는 일을 왜 하시겠습니까?


따라서 성령의 거룩하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과 정체성과 삶의 의미와 목적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여러가지를 듣고 자기 안에 넣지만 대부분은 자기 기준으로 듣습니다. 같은 뉴스를 보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반응이 다른 것은 들은 것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듣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적으로 듣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들은 말씀이 모든 것의 기준이고, 그것이 법이라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과 자신의 의가 다르고 충돌하면 하나님의 의가 온전한데 자신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상고하는 그런 들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하는 것,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이 의도하는 바를 자기 의의 기준이나, 자기 바램의 색안경을 끼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비유로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하라고 했는데, 하나는 간다고 하고 가지 않았고, 다른 한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갔다면 누가 순종한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래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가지신 뜻,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사람 창조의 의도와 목적, 그것입니다.


이 예정하심을 순종한다는 것은 대단히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을 순수하고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거룩하심은 곧 <구분>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복을 받기 위하여 성경을 지켜는 것을 순종이라고 포장한 사람들과 구분되게, 하나님의 의도하심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구분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구분됨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그것이 나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의에 성령으로 순종하는 것이 알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나에게 유익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유익인가?”

특별히 여기서 하나님께 유익이라는 것을 내가 유익해지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유익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의 찬양은 오히려 모독입니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를 본질로 아는 이들에게 찬양을 받는다는 것은 한국에 살면서 북한의 찬양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광은 ‘나타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를 믿고 순종하면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더욱 드러날 때 하나님이 유익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물질세계에서 풍요와 안정을 취하게 하시는 신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알이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으로 드러나려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들이 나면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것과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이가 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법에 순종하지 않고, 세상을 살면서, 물질세계의 성공을 꿈꾸는 자기 욕망과 바램의 소망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성경을 몸으로 지켜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금도끼 은도끼를 바라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한 욕심 많은 나뭇꾼과 같이.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성령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자기 인생의 운명으로 알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며, 그런 순종은 사람의 의지로는 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되고 거듭날 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순종 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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