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1-2) 사도 베드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7. 12. 20. 14:55 Writer : 김홍덕

베드로전서를 시작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상하게 사도라는 직함을 붙이면 좀 어색할 정도로 친숙하고 정감이 가는 사도입니다. 그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수제자라 할 수 있고, 그 누구보다 예수님과 많은 사건을 야기한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과 일으킨 사건들은 우리에게 ‘나와 같네⋯’라는 생각이 드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사도가 보여준 가장 현실적인 모습, 오늘 우리가 가진 가장 본질적인 마음을 대변하는 사건은 아무래도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니 어쩌면 매맞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느껴보지 못한다면, 그런 의심을 가질 수 없다면, 그런 부인을 해 보지 않았다면 진정한 복음으로 들어가기 어려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희망’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환난과 핍박에 대하여 위로하고 있고,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을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베드로전서가 자신의 말씀,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당하는 곤고함을 아는 사람들이 중요한 대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는 것을 본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베드로는 계집 종이 ‘너도 저 사람과 한 패다.’라고 했을 때,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하겠노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쉽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 받을 고난이 무서워서 거짓말하고 부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비겁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당시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이 로마에게서 독립하기를 바라는 열심당원으로서 품속에 칼을 품고 다닌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일제시대의 독립투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목숨 아까워서 부인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저러면 안 되는데 왜 저러고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지난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이 사람은 우리를 정치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따라 다녔던 것입니다. 지금 저렇게 매를 맞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로서 능력을 나타내서 로마를 이겨내야 하는데 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님은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예수님의 모습이기에 저런 사람은 알지 못하겠노라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께서 무엇에 관한 메시아요 구세주인지를 아는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대부분의 이유는 세상을 살아가는 육신의 문제 해결에 있습니다.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니면 건강이나 사업이나 자녀나 경제적인 문제를 기도하거나 그런 문제에 있어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를 신앙의 문제로 보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는 것이 이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세상에서 실패한 모습인데 그 실패자에게 가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니 그것을 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환난으로 여길 것인지도 여기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당하는 환난이 다른 사람 일요일에 일하러 가서 돈을 벌지만 주일 성수하느라 손해 보는 것과 같은 것을 환난으로 알고 식사 기도하는 것을 흉보는 것을 핍박으로 아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베드로 사도가 서신을 보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이것은 너무 익숙하지만 사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형수가 되어서 처형 당했는데 그것을 세상에서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실패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며 끌려가서 매 맞고 죽임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볼 때는 도무지 왜 저런 꼴을 당하는지 자신으로는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 예수님의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고 그것은 성령으로 인한 것이며 이제 와서 보니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예정하신 은혜로운 것임을 알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사형수요 실패자인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스승으로 순종하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알고서 그것을 전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정말 감동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참 공감할 수 있는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면서 자신이 가졌던 생각, 눈에 보이는 세상의 메시아로 예수님을 보던 그 생각과 안목이 참 부끄러워서 예수님께 ‘나는 예수님 당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세 번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베드로가 보낸 서신이 바로 베드로 전후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이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구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이 베드로서는 분명히 베드로 사도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억지로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식이 되거나, 희망을 이루기 위하여 성경을 몸으로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지를 연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베드로서를 잘못 읽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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