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사도가 예수를 보고서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으로서 성도들을 보니 그들의 심령에 자신과 같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국은 곧 구원이라고 역시 보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 안에 그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역시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구원은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어떤 죽음이 있어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죽지 않았는데 부활한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당연히 십자가를 지는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관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볼 때 실패자요, 죽어야 하는 사형수의 자리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 하려면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실패자요 죽은 자인 것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드러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고백하는 것 이상 명명백백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상의 가치고 열심히 살아보려 했고, 세상의 가치관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관 안에서 자신은 늘 죄인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온전하게 드러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 안에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관심법이나 투시력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을 그렇게 보증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 안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곧 생명의 마음인지라 등불과 같이 등경 아래 둘 수 없는 것이라서 드러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고백을 알기에 또 그 고백을 인하여 그들 안에 자신과 같이 예수님을 사랑함이 있다는 것을 보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원은 그 속에 있기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달력의 몇 일이 구원을 받은 날이라고 증거를 삼거나, 방언을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라거나, 교회에서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세례문답에 Yes라고 하고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과 같이 자아 밖의 어떤 것에 자기 구원의 증거를 삼을 만한 것으로 구원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듯 구원이 속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은 오래전 선지자들의 연구에서부터 증명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오늘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인 구원을 연구하여 보니 그것은 심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고난과 영광과 나타날 때를 증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는 신학과 같이 신앙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연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거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 밖에 있는 어떤 현상이나 학문이나 증거에 구원이나 그리스도의 영을 알게 하는 어떤 증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늘 그런 생각을 썩어 없으질 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이 구원 곧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게 되는 이 예언된 구원은 자기 안에서 어느 때가 자신의 구원인지를 알게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시각이 아닙니다. 달력으로 대변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 때, 밥 먹는 것으로 치면 12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져서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때와 같은 시간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증거를 찾습니다. 교회에 나니니까 당연히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 와중에 명백한 증거를 찾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일부는 방언이나 어떤 신비한 경험을 증거로 삼아 그 증거를 경험한 날을 구원 받은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력에서 때를 찾고, 그 때를 정한 일이라는 것이 자아 밖에서 일어나는 현상, 곧 눈에 보이는 육신의 일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옛날 선지자들부터 연구하여 예언한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인하여 구원을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가 최면을 걸듯이 자기 구원을 확신하려 시도합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수법을 많이 씁니다.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믿어야 한다고, 또 믿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믿으려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자기 안에 있다면 믿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을 것입니다. 있는데 뭣하러 노력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어 증거하고 보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누구인지만 알면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라고, 또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이 오실 것인데 그가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새로 가르칠 것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그리고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그 말씀들이 속에 있을 때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것이 온전한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이미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인하여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서 그 생명이 넘쳐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속에서부터 깨달아 진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거나 방언을 하거나 금식 기도를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도 넘쳐나는데 이것은 다 회 칠한 무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관하여 선지자 노릇하는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성경과 선지자가 예언하고 예수님과 제자들과 사도들이 증거한 구원은 우리 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시고하 하신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생명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들은 그 마음에, 그 속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어 그 본성이 우리 스스로가 구원을 알게 하고 그 본성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모든 것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온전한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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