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던 제자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교회에서 아주 널리 사용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때 소위 말하는 교역자들에게 질문을 하면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그렇다면 그렇다’는 색이 살짝 입혀진 체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와 유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말은 신학교를 나온 삯꾼 목자들의 ‘닥치고 믿어라’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하는 사람이 보지않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 아니라, 듣는 이들, 사도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사도들이 ‘보지 않아도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들, 곧 성도들을 보니 그들이 예수를 보지 않았는데 믿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보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직접 봤을 뿐 아니라 제자로서 살았던 베드로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니 자기 자신의 마음과 같았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보니 예수님을 사랑한 자신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그런 칭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너를 보니 어떻구나’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자기에게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소위 말하는 ‘말 안해도 알지?’라고 했을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가 그것에 대하여 알고 서로를 보니 동일한 것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입니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 여자들의 출산 이야기와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처음에는 아가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고 믈으실 때에 ‘내가 주님을 필로애(우정 같은 사랑)한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세계에 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고백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뭔지 알았고, 알고 보니 자기가 가진 사랑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가 이제 성도들에게 ‘너희가 예수를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자신 안에 있는 아가페 사랑 곧 하나님의 마음이 성도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 마음에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인지 아니면 자신이 예수님께 고백했듯 육신에 기인한 사랑인지를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볼 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이는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자기와 동일한 본성을 가진 존재를 알아봅니다. 그러므로 이 베드로 사도의 말은 서로가 동일한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베드로 사도의 위로를 받는 성도들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살아가는 일을 의논하지 않습니다. 교회 행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돈(사실 교회가 큰 돈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지만)을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도 서로가 같은 본성을 가졌으니 그가 쓰는 것은 나도 그렇게 쓸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서로가 상대가 무엇을 하든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이야기할 것이며, 그리스의 본성을 표현하는 삶의 모양과 행동은 서로에게 감동이 될 뿐 다툼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지금의 교회들도 다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많습니다. 상대나 자신이나 다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재정을 사용함에 있어 ‘어떻게 하면 청렴하게 할까?’ 고민합니다. 그것을 고민한다는 것은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서로 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나 그것을 듣고서 헌금하는 사람이나 서로 그것에 대하여 인정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법, 본성이 가진 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베드로 사도가 위로하는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성도들은 베드로의 권면을 듣고, 그것이 위로가 되면 힘이 되고,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을 볼 때는 자기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과 같기에 그들을 향해서 예수를 보지 않았지만 자신과 같이 사랑 한다는 것을 알고 보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본성이 있기에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보이지 않아 잘 믿어지지 않는데, 보지 않고 믿어야 한다니까 신념을 가지고 억지로 믿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노릇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 좋은 믿음으로 둔갑해 있는 현실입니다.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것은 우선은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생명의 본성이기에 볼 수 없는 것이고, 또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하심 대로 자기 안에서 보지 않아도 믿어지는 사람이어야 성령이 오신 것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면 그 속에서 생수가 넘쳐나리라 하셨으니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닥치고 믿으라’는 식의 것은 서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알면 잘 설명을 해 주지, 왜 보지 않고 믿어야 믿음이라며 일축하겠습니까?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존재인데. 자기 안에 있으면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오히려 잘 설명할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니 쓸데 없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사람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신학이란 학문과 종교적 지위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께 회 칠한 무덤이라 책망 받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람들은 무슨 의미인지 다 아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닥치고 믿으라’가 아니라는 것도 다 아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 사도가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순종했고, 그리스도의 피 곧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들이어야만 아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굳이 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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