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문장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도 있고 단지 들어서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어디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일까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곤고함에서 구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니 그것이 어디든 사람을 곤고하게 하는 자리일 것입니다.


물론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죄와 사망이 체감될까요? 정말로 자기 죄로 또 자신이 죽은 것 같아서 그렇게 구원을 갈망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조금만 양심적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고백할 것입니다. 자신이 죄에 빠져서 구원을 받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사람이 잠이 올까요? 그렇게 구원이 간절한데? 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가 무시당하는 것을 참지 못할까요? 죽었는데 그게 뭐 중요할까요? 죽었다는 것을 아니면 죽는다는 것을 인지했다면 살아야겠다는 것 외에 뭐가 중요할까요? 끼어드는 차에게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일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진정으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것에 솔직하지 않으면 평생을 죽을힘을 다해 교회에 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은 자신이 정말로 죄와 사망에 처해 있음이 애통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행위로 범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죄의식은 다 세상에서 습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는 그런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지, 삶의 곤고함에서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엄격한 차이입니다. 자기 삶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것에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 하나님입니다. 또한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은 결국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니 바알을 섬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믿음이란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구분이고 한정(限定)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혼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 우리 육신에 거하므로 영혼이 구원을 받으면 육신은 그 구원받은 영혼의 의를 표현하면서 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 섭리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남들처럼, 또 남들보다 어떤 것에서라도 더 나은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이 믿음의 결국이라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육신의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믿는 것에 관함이 아니라 영혼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도, 시련을 견디는 것도,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입는 것도 모두 모두 영혼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모든 것은 그 속에 있는 것에 기인합니다. 육신의 유전자가 남자면 외모가 남자고,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은 다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영혼이 어떤 영혼인지에 종속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의가 영혼의 정체성인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영혼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알고 그 세상에서 복락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을 믿노라 하여도 그것은 구원을 받은 영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리를 벗어나 있다가 우리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는 우리를 만드신 이가 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발로 들어오지도 않은 인생의 정의를 사람이 내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을 내 맘대로 하려는 마음에서부터 벗어나서 우리를 지으신 이의 맘대로 살게 되는 자리로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 정치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사회의 문제는 제도나 법이나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사람이 인생의 일을 자기 맘대로 하려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원하는 바가 모두 다르기에 서로 자기의 원하는 대로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려 합니다. 그게 돈이고 권력입니다. 자기가 선택하거나 스스로의 생명을 자아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자신을 인지하고서는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성공이라 여기는 것, 자기가 꾼 꿈을 이루어내는 것이 성공이고 잘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육신은 육신의 법대로 살되, 그 의가 어디서 나오느냐의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은 밥 먹고 잠을 잡니다. 이것은 공산국가나 사회주의 국가나 전제주의 국가나 민주주의 국가나 다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의는 다 다릅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다 의(義)입니다. 모두가 같아 보이지만 그 의가 다 다른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같은 행동을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성공이고 의로운 것이라는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밥을 먹으나 자거나 심지어 자기 몸을 남을 위하여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다 소용이 없지만 자기 안에 있는 의가 하나님의 의인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의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그 자리를 떠나서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는 자리로 간 것이 선악과며 죄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구원, 성경이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전한 구원은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도 이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포스팅한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과 영광과 기쁨의 모든 것이 이 기준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기에 그 피뿌림 곧 그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지 이것이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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