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보다 세상에서 더 잘사는 것을 볼 때 ‘그래도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라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곤 합니다. 상대적인 즐거움이나 부유함의 부족에 대한 반대급부 혹은 보상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의 상급으로 죽어서 천국에 가면 상황이 역전될 것이라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블로그에서 늘 언급하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의 삶은 우리 영혼의 영원한 삶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왜곡되기는 하지만 다르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칼의 그림자가 돋보기처럼 나오지는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하고 만족하며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는데 영광스런 천국에 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의 성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대로 산 사람들이 그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 의의 세계로 흡수되듯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삶이 영광스러워야 영광스런 천국에 갈 수 있고, 이 세상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야 모든 것이 만족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듯, 이 세상은 곤고하나 천국에 가면 편히 쉴 것이라는 것은 다 세상적인 프레임입니다. 세상에서 육신의 수고 다음에 육신의 평안이 주어지고 한편으로는 편히 쉬고자 하여 열심히 일하는 그 프레임에 천국을 각색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편지를 수신하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성도들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으로 즐거워한다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베드로 사도 안에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인한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있는데 베드로 사도도 그것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듯 성도들 역시 분명히 자신의 마음과 같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의 영광스러움과 즐거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즐거우면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괜히 히죽거리며 다니고 난데 없이 큰 소리로 웃는 사람들은 대게 정신적인 질환이나 장애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즐거움은 다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즐거움, 그것도 말로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역시 그럴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도 없이 즐거워하고 있으면 미친 사람 곧 성경이 말하는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유는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요한3서에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한다.’ 하니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만 그게 바로 이유 없이 기뻐하는 정신나간 행동입니다. 영혼이 잘 됨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육신처럼 먹고 마시고 입고 성공하는 것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단지 하나님의 의를 바라는 것을 위하여 있기에 영혼은 오직 하나님의 의와 같아지는 그 하나가 잘 되는 것이고 존재의 이유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가 잘 된다는 것은 내 영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되어 범사가 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즐거움은 육신의 어떠함이 세상의 기준으로 잘 되어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 영광스런 즐거움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로서 자신의 의미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세상 나 아닌 다른 사람 중의 반이 나와 다른 이성인데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와 결혼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 상대가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고 그로 인하여 나 또한 남자로서 또 여자로서 온전한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 사랑이듯,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나의 어떠함이 예수님께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의미가 있어지는 것을 예수님께 기도하면 육신의 일이 잘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회귀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완전하게 실패한 분입니다. 세상에 사형수로 처형 당하는 사람보다 더 실패하고 몰락하며 부질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개똥 밭에 뒹굴어도 이 세상이 낫다고들 하는데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자기 목숨을 빼앗기는 사람보다 더한 실패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잘못한 것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실패했을 뿐 아니라 억울함도 말할 것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육신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그런 용감 무식한 믿음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치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어리석고 답답한 일이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자기 최면에 빠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다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예수님이 자기 인생의 의미가 된다는 것은 단 1%도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의 평안과 복락이 예수를 믿어 된다는 신앙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치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믿음을 가지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귀신 들린 바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말할 수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정도의 기쁨은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은 천국에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인생의 운명을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운명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면서 ‘저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겠구나!’라고 여기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바보 멍청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보고 그 예수를 사랑하여 예수님을 자신에게 절대적인 의미로 순종하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즐거움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은 당연히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시험에 합격해서, 사업에 성공해서, 큰 병이 기적적으로 나아서 느끼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을 세상이 주는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할 수 없는 세계라고 했듯, 또 예수님께서 이것은 세상에 없기에 비유로 밖에 말 할 수 없다고 하심과 같이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즐거움과 영광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즐거움과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았을 뿐인데 그것이 속 심령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 인하여 넘쳐나는 생수,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기쁨이 넘쳐나는 존재가 되어 항상 기뻐하는 존재가 되는 법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듯 말로 할 수도 없는 즐거움과 영광인데 그 이유를 가진 사람은 서로를 보면 서로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멀리 있어도 알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생명의 세계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고 사람에게 위로를 얻는 것은 배워서가 아니라 본성이 그런 이유이듯,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인생이 존재했다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태어나 보니 인생이고, 인생은 고난이기에 하나님께 위로를 받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알고 봤더니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여겨지는 사람,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을까 싶은 마음이 충만할 정도로 하나님께 감사가 있는 사람들 만이 알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비밀인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태어나고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그렇게 감사하고 영광스러우며, 어떻게든 예수를 부인하려 해도 안 되고, 어떻게 성경을 의심하려 해도 도무지 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면 당신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의미가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도깨비 방망이일 수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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