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점이 없고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점과 흠은 외모나 삶의 모습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점이야 그렇다 치고 흠은 기준이 아주 모호합니다. 예를 들어 키(신장)가 얼마여야 육신적으로 최적이며, 몸무게는 어떠며 생긴 것은 또 어떻게 해야 흠이 없는 상태인지 정의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신의 모양이나 행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람마다 모두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점과 흠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 점과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 대한 기준입니다. 종합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고도 오래 전에 이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처음 만드신 상태의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기로 하시고 만드신 사람이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하나님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존재를 보면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이었습니다. 그 목적으로 만드신 아담을 보니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사람의 모습이 온전하고 온전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람이 창조된 이후에 어떤 업그레이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그런 말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의 관점에서는 다르겠지만, 진화는 그 목적이 없는 일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진화했다면 적어도 사람은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과 의미도 없는 진화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여튼 우리 인생들은 창세기에서 창조된 모습이나 예수님의 오신 모습이나 오늘 우리의 모습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보시고 만족하심은 육신의 어떠함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온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에 아주 온전한 존재라는 것, 그러니까 이 육신은 점과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육신은 물론이고 그 안에 있는 본성도.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하나님의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그것이 육신으로 나오는 상태일 때 점과 흠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곧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바로 점과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외모도 외모지만 무엇보다 그 마음의 본성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둘은 모두 사람입니다. 어느 것도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콜라가 없는 병은 그냥 빈병이고, 콜라병에서 쏟아진 콜라는 먹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본성과 육신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꾸 뭔가를 합니다. 마음을 수련한다느니 명상을 해야 한다느니 참선을 해야 한다는 등이 다 그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가지신 뜻을 표현하기에 너무 온전한 우리 육신을 자기가 인생을 선택하지도 않은 주제에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흠과 점을 생각합니다. 그렇다보니 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인생의 본성이 없는 것이 점과 흠이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은 점과 흠이 넘치는 분입니다. 넘치다 못해 죽임을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점과 흠이 없다고 하셨다면 당연히 육신에 대한 기준, 세상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기준, 사람의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기준과 안목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논리 같지만 이것은 육신인 자신에 대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면 절대로 동의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의되고 순종되면 그렇게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점과 흠은 한 마디로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예수님을 부정하게 여겼기에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부정하고 악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어린 양이라고 했고, 그 어린 양의 피 곧 희생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점 없고 흠 없는 것으로 여기시는지를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신앙, 어떤 학문, 어떤 노력, 어떤 수련, 어떤 다짐이나 신념이 우리가 가진 인생의 본성을 억제하고 고치려는 노력이라면 참 가상하고 경건한 것 같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과 가치관은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관점에서 하나님과 절대적인 적대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절대적인 악입니다.


예수님께서 점과 흠이 없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과 뜻에 관해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을 부정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육신의 본성을 이기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위와 외모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부정함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안다면 이 육신이 그 목적에 얼마나 온전한지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드려 보이셨습니다.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지 보존하고 안위케 하는 것이 아니며, 이 육신은 강해지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해져 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고를 하기에 너무 적합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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