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인 교리를 넘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상식과 같은 말입니다. 물론 그 마라에 대한 의미 부여는 사람의 신앙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어쨌든 이는 이제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상용구처럼 그렇게 알고 있기만 하면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되는 것 같은 대중적 착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나 사람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이 가진 구조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의 구속은 우리가 죄를 범했기에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 벌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그 죄의 값으로 죽으셨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의문을 수반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돌아가실 때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지을 죄까지 다 대속했는가?’와 같은 의문들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빌어 그것이 가능하다고 넘어갑니다만 넘어갈 뿐 사람들의 이해와 동의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믿어라!’는 주문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은 죄는 우리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이 대속하는 죄가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죄의 정의가 가장 선행되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앞서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조 안에서 죄는 사람이 행동으로 범한 죄입니다. 도적질과 같은 행위나 음란한 생각과 같은 부정함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대속하신 죄는 그것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는 언제나 그 안에 있는 생각과 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글에서 이것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삶과 또 사회에서 경계하는 모든 죄는 결국 그 마음 안에 있는 것이 표현되므로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늘 사람의 중심이 어떤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물론이고 사람들에게 비난 받을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에서 비난을 받아야 하는 유일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라 여기고 가치를 부여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 바보 같은 모습 그 하나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죄인이 된다고 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는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것이 세상의 가치관이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죄,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우리 심령이 무엇을 의로 여기는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가지신 뜻이 자기 안에 있어 그것이 자기 삶의 모든 가치기준인 사람은 죄가 없는 것이고, 그것과 다르게 자신이 가진 어떤 기준에 의하여 세상의 일과 사람의 모습과 일을 판단하는 의로움을 가진 사람은 자기 선악의 기준을 가졌기에 그것이 하나님과 다르므로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살라고 만드셨는데 사람이 자기가 가진 의의 기준으로 어떤 것을 선하게 여기고 또 어떤 것을 악하게 여기는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가 아니며,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자리를 벗어난 것 곧 죄의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그 원어인 ‘하말티어’라는 말이 가진 의미 그대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벗어난 모습을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선과 악을 함께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선하게 여기는 것과 악하게 여기는 것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속하셨다는 죄는 바로 이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으로 지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 마음에 가득한 부정함과 같은 것은 심령 안에 하나님과 다른 의로움에서 비롯된 표현이지 죄의 본질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죄의 모든 것으로 보는 것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로 인하여 사람들은 행위를 구속하면 의로워질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속은 인생들이 다들 자기가 가진 의로움을 가지고 서로 판단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것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죄와 사망의 자리를 떠나 어떤 자리로 갈 것인지를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이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이 우리의 죄를 인함이라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우리가 행한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벌을 받으신 것이라는 것은 틀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그릇된 원리를 가지고 보면 이해가 안 되고 어렵습니다. 반대로 올바른 원리로서 보면 모든 것이 쉬운 것입니다. 신앙을 공부하고 학위를 준다는 것은 신앙을 어렵게 여기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바른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끼우려 하니 어려워지고, 그래서 어떻게 끼울 것인지 연구하고 공부하다보니 신학이라는 것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자신의 것으로 받아 자기 운명으로 순종할 수 있는 모습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너무 쉬운 것이며, 성경은 모두 우리 인생의 이야기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에는 공부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공부나 신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단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인생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때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모습 그대로,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육신을 극복하는 신념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는 원래 그 모습 그대로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됨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인생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기에 사람을 더욱 단련하고 수련해야 더 좋은 것에 이르고 성공할 수 있다는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볼 때는 완전한 죄인이고, 그렇게 세상을 이끄는 이들에게는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을 전하는 아주 흉악한 범죄자가 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자리를 떠나서 자기 맘대로 자기 안에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자기 인생과 세상을 세상에서 배운 대로 자기가 가진 의의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살다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십자가를 보고 알 수 있게 하신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의 구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속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기에 그 예수님의 피를 보배로운 구속의 피라고 하고, 그 피로 인하여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여 생명을 얻기에 그 피로 인하여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피가 생명인 것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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