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룩이라는 것을 아주 깨끗하고 사용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육신의 행실이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한 적도 없는 순결한 상태와 같은 것을 거룩함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무엇에 깨끗해야 하고, 어떤 것을 오염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행위를 기반으로 한다면, 그러니까 행위로 하나님께 의로워지려는 생각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행위를 오염된 행위로 보고 그런 행위는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며, 소유한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느냐를 신앙의 근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또 무엇을 드리는 것이 거룩한 것인지를 목숨 같이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어떤 기준에 따라서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 할 것을 구분하고 그 구분된 상태가 되는 것이 거룩입니다. 다른 것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염된 어떤 것 하나라도 묻어 있는 것과 묻어 있지 않는 것이 구분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렇듯 거룩함이란 구분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구분될 것인지가 핵심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부르신 자의 거룩함과 같이 우리도 거룩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1:15) 그러려면 우리를 부르신 자는 어떻게 거룩한 것인지, 어떤 것과 구분되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르신 자와 같이 거룩해야 하는데 부르신 자가 어떤 거룩함, 어떤 구분됨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이 말씀을 자신 것으로 받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신 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또한 예수님이십니다. 부르시고자 하신 뜻과 부르신 내용은 하나님이시고 그 부르심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와 뜻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그 부르신 뜻을 알게 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듯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구분되는지, 어떻게 구분되기에 거룩하신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우리에게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는지는 그 본성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위가 그 속에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면 그 행위가 본성을 대변하는 것임도 아는 것입니다. 물론 행위로 속을 바꾸려는 반대 방향의 어리석은 신앙을 가진 이들을 이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하신 질문은 아마 “네가 어디에 있느냐?‘일 것입니다. 아담을 만드시고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지만 질문은 그것이 처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하셨다는 것은 그 답을 통하여 그가 질문하신 이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가졌는지, 질문하는 의도를 알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하신 상황이 좀 특이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담이 그것을 먹었습니다. 먹고 보니 자신이 부끄럽게 여겨져서 숨었습니다.(부끄러워진 이유는 다른 글에서 보시면 됩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잘못된 행동(Do)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질문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Do)’라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질문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Be)’에 관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해 주시는 분이라든가? 무엇을 하는 자라든가? 천둥을 다스린다거나 생명을 주관하는 자와 같이 어떤 행위로 그 정체성을 메김 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름은 정체성이니 이름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은 무엇을 해 주시는 신이나, 어떤 것을 행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신과 종교, 사람들이 믿거나 만든 신과 종교는 모두 하나 같이 사람이 그 신께 무엇을 하면 그 신이 사람에게 무엇을 해 준다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알에서부터 부처나 산신령이나 무당이나 모든 종교와 신앙이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든 신과 종교는 이미 존재하게 된 이 인생이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며, 무엇을 해야 바라는 바를 얻을 것이며, 무엇을 해야 선할 것인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고 그것이 사람들이 신앙하는 신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늘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고 믿는 신은 모두 사람의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에 반응하며 의롭게 여기고 그것을 선히 여겨 인생이 바라는 육신의 복을 주신다고 하는 신인 것에 반해 하나님은 사람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즉 ‘너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물으시고 또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를 물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그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보고 의롭게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또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있는 존재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Do와 Have가 아니라 어떤 Be(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답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스스로 인생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서 스스로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 그래서 그것을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그러면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해 주시는지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가치관은 어떤 행동과 어떤 소유를 드리는지에 따라 그 결과가 종속되는 투자의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비해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마치 부부와 같이, 부자와 같이 무엇을 해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관계를 바라시는 분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의 가지신 뜻 역시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을 바라심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를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 인생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은 존재인 것을 고백하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또한 우리를 만드신 뜻을 깨닫고 순종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 무엇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의로워진다는 율법을 가진 자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죄로 여겨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자, 곧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뜻을 아는 모든 자들 역시 그 자신의 운명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그런 가치관을 가졌기에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 자신도 행위의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고 여기는 가치관을 가졌기에 뭔가 하지 않는 이들을 심판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같이 그것을 정죄하고 자신도 그 법으로 정죄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 이제 더 이상의 세상의 가치관과 같이 하나님께 공로나 소유를 드려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사람으로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를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관계가 정리되면 그 관계에 기인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모든 행실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마치 결혼하면 부부가 서로 결혼한 관계로서 살아가는 것 그러면 그 결혼은 거룩하고 온전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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