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속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무엇을 의로 삼는지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의’는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의는 민주주의가 그 국가의 모든 것의 근간인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사람이 무엇을 의로 여기는 것인지가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속 심령을 보신다는 것은 그 속에 무엇을 의로 여기는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있는 의가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의 근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순종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숨쉬는 모든 순간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다른 의를 가진 사람은 때로 행위가 하나님의 의가 속에 있어 그것을 표현한 사람 같아 보일 수는 있어도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서 <노릇>한다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모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성경은 하나님의 의가 그 속사람의 정체성인 사람이 살아가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때로 행위로 그 모양을 따라 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항상, 범사와 같은 빈도부사를 다 지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느 순간 어떤 하나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은 그 본성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정체성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거룩하기를 권면하면서 그 이유로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을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하나님께서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것은 행위 자체를 기준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그 속에 있는 생명의 표현이기에 그 생명을 판단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알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과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하신 것이 상충되지 않는 하나의 말씀인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베드로 사도는 이 거룩함,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행위의 근간인 의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음을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결국 예수님의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의(말씀)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고 그 십자가에서 뿌리신 피를 보고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순종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가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가진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그 행동을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어떠해도 하나님께서 그 행위가 어떤 속사람에게서 비롯되었는지를 아시기에 그것을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로 행위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불사르게 내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사랑 곧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미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신 것도 궤를 같이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 속에 있는 생각 곧 의가 표현된 것입니다. 단지 표현해 놓고 보면 때로 생각이 달라도 같은 모습일 수 있지만 그것이 사람 눈에는 같아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판단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그 속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이 서신의 인사에서부터 말씀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떤 의가 그 속사람의 정체성이어야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실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의 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이 속에 있어 보이신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아주 괴리가 있습니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다름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절대적 차이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면 세상에서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성공한 자리로 가고, 기적을 일으키는 자리로 가는 것 같지만 정작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가장 실패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속심령에 있어 그것이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행위로 나타난다면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순종을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구속은 조상의 유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어린양의 피 곧 예수님의 피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조상의 유전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고서 육신의 일이 평안하고 복된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는 가치관을 말합니다. 이것이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며 이 블로그에서 말하는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가치관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상의 유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실 때 말씀하신 것 역시 같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육신이 보존되고 평안하면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지만 예수님은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소비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존재며,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세월을 살아낸 흔적과 값으로 약해지고 늙으며 또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는 수고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렸다는 것이 바로 이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의 의를 자기 정체성으로 가지고 그 생명으로 비롯된 행위를 나타낼 사람들, 곧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과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방향이 다릅니다. 생명이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듯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사람은 속에 있는 생명이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될 것이나, 조상의 유전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과 같이 겉을 바꾸어 속을 의롭게 하는 역방향성을 가질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사람은 육신의 평안과 보존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거나 복을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과 같이 그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소비할 것이고, 그렇게 소비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또 육신이 소비되고 늙고 약해지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알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 사도는 이 사실을 두려움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그네로 있는 동안에 두려움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것은 이미 자기 밟은 땅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삶의 환경이 조상의 유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가치관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지 말로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로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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