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 이런 말씀을 대하면 자연스럽게 ‘행동이 거룩하고 경건해야 한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떻게 거룩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행실이 거룩하게 되라고 했지 행실로서 거룩하게 되라는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실을 거룩하게 하는 것과 행실이 거룩한 것은 말은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것입니다.


이런 미묘한 차이는 13절에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속심령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동이라고 했지, 마음만 동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음이 정해지면 행실은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사도가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기본 섭리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으로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표현되는 존재입니다.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역방향은 유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사람을 바꾼다고 속이 바꾸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인이라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는다고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사람이 그 행동을 바꾼다고 그 정체성이 바뀌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그 정체성의 거듭남 없이 행동만 성경을 지킨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3-15)


베드로 사도의 이런 말씀은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지으실 때부터 그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표현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반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실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신 것은 행동을 거룩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속 심령이 거룩하여지면 그 모든 행실이 거룩하게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신앙이고 존재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존재가 바뀌면 모든 것이 다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바꾸지는 않고 자꾸 자기 행실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렇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도 믿기만 하면 되는데 자꾸 뭔가를 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 하려는 무언가는 성경대로 행동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존재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존재가 되지 않았는데 행동만 그렇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그 행동을 거룩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이 있는데 “예수만 믿으면 행동이 거룩하여 지는가?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믿는다고만 하면 되는가?”라는 아주 보편화되었지만 너무나 바보 같은 질문들을 마치 자신이 신앙적 투사라도 된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정확히는 하나님도 신앙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이야기인지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우선은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말은 행위에서 제외합니다. 분명히 말과 행동은 그 구분점이 명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믿는다고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느냐?’라는 질문은 마치 말은 행위가 아닌 듯 말하는 것입니다. 말도 육신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세례문답이나 교회에 왔을 때 그 마음속에 믿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고백이 없음에도 세례 문답에서 또 교회에서 그래야 한다고 하니 ‘예수님은 나의 구주’,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그것이 명철이나 되는 양 입에 붙이고 다니고 대표기도라도 하게 되면 그것을 수식어처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로마서에서 말씀하시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눈감고 아웅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믿음)=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무도 이것에 대하여 또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의는 근원과 같은 것이라서 말과 행동이 다 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의가 거룩해야 말과 행동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기만 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느냐?’를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느냐?’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큰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우습게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말하면, ‘예수를 믿기만 하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는 것은 예수님은 행동이 없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하니 그것을 내 행동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이 되신다고 믿는데 왜 <예수 + Something>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과 정체성을 믿지 않기에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그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다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주장하는 바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그것이 더 답답한 것입니다. 그럴 값이면 예수는 왜 믿는 것일까요? 그 무능한 예수를, 믿는데 아무런 행동도 자아내지 못하고 변화시키지 못하는 예수를 왜 믿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가진 이러한 어리석음과 어두움이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오해하게 만듭니다. 베드로 사도가 거룩하여 지라고 말씀하셨는데 거룩하게 행동하려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어두움 때문입니다.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니 자기 행동 하나 하나를 거룩하게 채워가려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너나 나나 다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협하기를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무슨 궤변입니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구원 받지 못했다는 자백인 것입니다.


모든 것에 거룩하여 지는 유일한 방법은 그 존재 자체가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개가 아무리 사람 같아지려고 노력해도 안 됩니다. 남자가 여장을 하고 여자 노릇을 하거나 그 반대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결정적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체성이 가진 본성을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행위를 하나씩 거룩하게 하려면 평생을 다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존재가 거룩해지면 오히려 무슨 짓을 해도 거룩한 것입니다. 남자는 어떤 꼴로 살아도 항상 남자고, 여자는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여자면 개는 어떤 순간도 항상 개인 것입니다.


이렇듯 존재가 거룩해지는 것은 그 마음, 곧 속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의가 행위와 소유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 곧 하나님이 내용이시고 자신은 형식이라는 이 정체성에 순종되어지면 소유와 행위를 드려 의롭게 되려는 모든 사람과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그런 거룩함을 가진 사람은 그 행위가 모두 거룩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행위와 소유를 드려 의롭게 되려는 사람과 살아가는 모양이 동일해도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먹고 자고 일하면 때로 욕하고 싸우고 화를 내어도 거룩한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실수로 들어  갔다고 여자가 되지 않듯이, 속 심령이 거룩한 사람의 삶의 모양으로 인하여 그 속사람의 거룩함이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가 그 육신으로 표현되는데 세상 사람들이 우려하는 그런 모습으로 행하고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또 하나님의 의가 그렇게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속 심령이 되어 그 심령의 의로움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육신으로 부정한 짓을 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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