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있어 은혜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이루어지거나 얻어진 것, 또는 자신이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유익이 된 일과 같은 일들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혜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만 그 얻어진 것, 수고하지 않고 얻어진 것이 어떤 범주이냐는 천지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며 바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입니다. 그런 생각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사업이 잘 되는 것이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 그리고 일터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은 그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열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하여 형식인 육신의 수고를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이 블로그에서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혜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세상과 육신과 그에 속한 일은 그렇게 표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도 당연히 이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신과는 다른 거룩(구분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구분됨은 그 정체성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일을 자신들의 신께 구합니다. 설사 그 신의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호박에 줄 쳐서 수박이 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나 소유의 드림에 감동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오히려 화를 내시는 분이십니다. 남자가 비키니 선물을 받으면 좋아하겠습니까? 정체성에 맞는 대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하는 분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어떤 행위에 관한 것이나, 눈에 보이는 세계인 육신과 세상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우리의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특히나 사람이란 존재는 그 스스로가 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힘으로 인생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부모로 인해 났으니 그것이 부모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부모는 어디 스스로 났습니까? 그렇듯 사람은 스스로 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 존재의 의미도 스스로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존재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철학이다 과학이다 하는 것들이 다 그런 이유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 가장 절실한 문제는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지 않고 감추인 것이기에 사람들은 자기가 옳은 대로 그 의미를 정합니다. 인생을 돈에서 의미를 찾기도 하고, 가족에게서 찾기도 하고 사랑이나 성공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감을 받는 것도 더러 있으나 대부분이 공감하는 것을 포함해서 그런 모든 것은 모두 존재하고 난 다음에 살면서 정한 것이지 존재하기 전제 존재하도록 한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은혜는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기 전에 계획되고 정해진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혜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얻은 것이기에 자기 힘으로 인생에 들어 온 것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자신이 살게 된 이유를 스스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데 그것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이며 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신 책이 성경이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혜는 그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성경은 우리가 널리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참고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법을 설명한 매뉴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설명한 책입니다. 이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되는 것을 설명한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이러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책이 성경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국 우리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말씀하시는 책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 바로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인하여 알게 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가져올 은혜(벧전 1: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나타나셨는데, 베드로 사도의 때에도 이미 예수님께서 오셨다가 부활 승천 하셨는데 왜 새삼스레 ‘나타나실 때에’라는 가정 혹은 미래적인 표현을 하였을까? 이는 다시 생각해보면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인지하고 깨닫는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고에 무엇을 찾으러 가서 쉽게 찾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찾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상황을 보면 창고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그 물건은 창고에 있었지만 찾는 이가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때 비로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계셨지만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바로 인지할 때 그 때가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바로 인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는 우리가 육신의 유전으로 전해 받은 신앙, 곧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일에 관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눈에 보이는 이 세계를 나타나게 하신 이의 의를 아는 신앙으로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용하시는 이가 성령이고, 이 계획을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자기 행위로 지켜내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하고 그 의로움의 대가로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의 평안과 성공을 담보 받으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존재의 정체성을 보이신 분으로 만나는 그 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인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을 만나는 때가 그 때라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인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자신에게 자신 스스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의미로 다가 오는 그 때가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때이고 그것을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 안다면 그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자신에게 절대적인 은혜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와 은혜의 때의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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