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13-25) 창세전부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2. 2. 09:56 Writer : 김홍덕

요한복음 8장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아직 오십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는 질문을 했고 예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당연히 격분했고 예수님을 돌로 치려해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께 ‘창세전부터’ 함께 하였던 뜻을 이루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알려지신 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간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간 개념과는 다릅니다. 시계와 달력이 알려주는 객관적인 시간(이것을 크로노스라고 합니다.)이 아니라, 주관적인 시간(이것을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안에서 선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객관적 시간으로 본다고 해도 목적을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목적이 먼저지 목적이 나타난 바가 먼저는 아닙니다.


휴대전화는 만들어진 제품보다 전화기의 기능을 설계한 설계가 먼저이고 그 설계보다는 전화기의 목적 곧 전화를 하겠다는 요구사항이 먼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이 이 법 아래에 있는 것은 이 세상이 바로 이 법(목적이 형식으로 나타나는 법)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것 역시 그 사용 목적이 먼저 정해지고 그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사람도 그런 본성을 가졌고, 그 본성에 따라 목적이 상실되면 폐기합니다. 목적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세상이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하고 또한 그 목적과 뜻을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뜻과 생각이 형식과 행동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그 성품과 존재를 표현하시겠다는 의와 뜻이 있었고 그것이 세상과 또 사람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가장 온전하게 표현된 표상이자 기준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를 예수님은 첫 열매라고도 하고, 맏아들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바로 우리 모든 인생의 설계도라는 것입니다. 이를 알면 당연히 예수님이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의와 뜻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록 육신은 2,000여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지만 그것은 나타나신 것이 그 시점인 것이지 예수님이 가지신 정체성은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정체성으로 인하여 이 세상이 비롯되어진(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창세전부터 예수님이 계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선 시간이라는 것을 항상 순차적이고 객관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돌로 치려한 유대인이 그렇고, 오늘 대부분의 기성교회가 그렇습니다. 시간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단지 시간만 그렇게 보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시각과 안목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에 기인합니다. 즉 형식으로 나타나는 내용을 본질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그렇게 순차적이고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졌기에 나타난 것을 본질로 봅니다. 12시가 점심시간이 된 것은 점심을 먹어야 하는 명제가 12시로 표현된 것이지 12시 자체가 점심시간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듯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면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존재의 목적을 보는 안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사람에게 진노하시는 부분입니다. 목적을 보지 못하면 형식을 본질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도 객관적인 것을 기준으로 보게 되고, 성경을 볼 때도 문자와 문장 그대로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같이 죽자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들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목적과 생각과 무엇보다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자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어두움에 있는 것이고 맹인이며 사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것, 이 하나를 믿는 것이 이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전능하고 능력이 있으며 영원한 분이니 그렇겠지 생각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말은 상식을 벗어난 말인데 이것을 아무런 이해 없이 그냥 믿으려고만 하면 그것이 맹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맹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 이유이자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계셨다는 것이나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는 것과 같은 말씀을 이해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격분할 뿐.


아울러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빌어 이 세상에서 육신의 성공을 바라거나, 육신이 평안할수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되는 일에 사용되는 수고로움이 있을수록 감사하고 그런 수고로 인하여 인생이 쇠잔하여 지는 것을 감사와 영광으로 여기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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