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물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육신의 삶의 바람을 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의 범주 이상의 것이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사랑이라고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가야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흔하고 대부분의 경우 정의를 내릴 필요도 없는 말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관념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잘못되었다기보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희생하고 헌신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남을 위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여 밥을 지어주는 것에서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것까지 다양합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개념은 모두 표현된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그 사람 안에서 표현된 것이기에 사랑의 본질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모든 말과 행동이 결국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의로움의 표현입니다. 무엇을 선하고 의롭게 여기는지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기가 의롭게 여기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대로 행하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괴로워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성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은 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입각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도 신념이나 사명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가진 본성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 역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된 것이지, 인류애나 혈연 혹은 다른 종교나 가르침에 의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순한 인류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이 표현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 말씀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인 너와 나에게 표현되고, 또 서로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므로 사랑이 표현되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 또한 서로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때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떤 것도 필요 없고 오직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행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서 표현한 사랑의 모습과 같거나 더 숭고해도 사랑이라 하지 않는다고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서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사람이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에 있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뜻과 생각과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과 그 속에 속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니 사랑이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의미입니다. 사랑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의미가 있기에 수고하고 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남자가 또 여자가 반씩 있는데 그 중에 단 한 사람이 자신에게 여자로서 또 남자로서 의미가 있어질 때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이와 사랑의 표현인 육체적인 행위를 하면 불륜이고 매춘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미가 되신다는 것, 그 의를 표현하시는 사랑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의미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그 창조 목적은 또한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다름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 형식과 나타난 것이 없는 그림자도 없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형식이 간절하셨기에 만드신 존재가 바로 사람과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 사람은 피조물이기도 하지만 또한 간절한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간절함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와 같은 말씀들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과 의도하신 관계를 분명하고 간절하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바로 잡고 온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아들도 제물로 드릴 정도로 간절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 역시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적인 의미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게 하신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려면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날 것이니 그제야 육신을 가진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현될 때, 그렇게 표현되는 것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표현된 것을 보고 형제가 또 지체가 또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신 의와 뜻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것을 알게 되었듯, 하나님의 의가 그 속에 있는 사람에게서 그 속에 있는 것이 육신으로 표현될 때 그것을 보고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 형제를 사랑하려면 먼저 그 사람에 그 육신으로 표현해 낼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의는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특히 사람에게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소비하여 표현할 때 그것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게 되도록 하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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