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 (5)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9. 29. 12:37 Writer : 김홍덕

행함은 믿음의 표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모두가 알듯이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과정과 삶과 보이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계획이고,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모든 삶이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것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뜻임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사람에 대한 목적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모든 형식은 내용만 갖추어지면 그에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동차는 주인이 가고자 하는 장소나 일이 생기면 가게 되고, 그릇은 담을 재료가 생기면 사용된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만 알면 사람의 숨 쉬는 것에서 죽는 순간까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대로 사용된다. 즉 삶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은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 목적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사람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 안에 있을 때 생명이 된다. 그것이 생명인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와 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고 있으면 살아 있고, 아무리 멀쩡해도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시계의 주인이 시계에 기대하고 의도한 목적을 기준으로 살았고 죽은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마찬가지기 때문에 사람 안에 살아 있는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을 믿음으로 인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과 행함이 다른 것이겠는가? 다만 여기에는 엄연한 순서가 있을 뿐이다. 믿음과 행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믿음이 먼저이다. 사람으로 태어남이 있어야 사람으로서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사람이 그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신의 운명이고 정체성이며 자신이 살아야 할 본분임을 믿는 것이고, 행함은 그 믿음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바로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믿음을 오해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의롭게 되고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경찰이라서 경찰차를 타는 것이고, 경찰복을 입는 것이다. 경찰이 아닌데 경찰차를 탄다는 것은 대게의 경우 범죄자이고, 더욱이 경찰이 아니면서 경찰복을 입고 경찰행세를 하는 것은 엄연한 범죄이다. 그렇듯이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운명은 믿지 않으면서, 성경의 있는 말씀을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은 다 죄다. 그것은 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간첩의 사회봉사활동과 같은 것이다. 그런 삶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과 신념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신념을 혼돈 한다. 믿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면에 신념은 잘 되지 않는 것을 시도하는 의지이다. 아들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한 자기 스스로의 의지가 필요 없지만, 사장이나 대통령이나, 장군이 되는 것은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데 신념을 가진다. 자신이 하나님께 보인 충성스런 행동에 하나님께서 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 착각한다. 그건 분명한 착각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신념과 착각하는 것은 사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신앙을 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수고한 것에 대하여 늘 보답이 있고, 또 수고한 사람은 보답을 기대하듯, 하나님도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정의 내린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같이 수고한 공로에 보답하는 신은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이방신이지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공로와 수고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라, “너는 누구냐?”가 제일 관심사이신 분이다. 누구인지만 알면 행동은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가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것은 어느 장소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이 무엇이냐?’라고 하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가끔씩 변절한 사람을 대하면서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라든가, ‘너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와 같은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정체성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알던 그 사람의 자리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상대를 느끼면 그 상대의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본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수고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고 천국에서 살게 해 주실 거야’라고 믿거나, 믿음이 그런 것이라며 ‘믿는다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라고 가르치는 것은 다 경찰도 아닌데 경찰복을 입고 경찰 노릇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것을 <선지자 노릇>이라고 하셨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존재의 하나님께 공로와 소유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소유와 공로를 드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두루미에게 접시에 담은 산해진미를 주는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아버지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아버지께 선물을 드리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수고하는 육신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소산을 하나님께 자기의 것이라고 드리는 것이 가당하겠는가? 그것이 또한 가인의 교훈이기도 한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어떤 신념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십자가의 도가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뿐이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세상과 육신이라는 형식을 본질로 알고 산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게 될 수밖에 없다. 방향이 바뀌었는데 그것은 인정하지 않고 되겠는가? 믿음으로 인한 행함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고, 신념으로 인한 행함은 형식을 바꾸어 내용을 바꾸려 하는 것인데, 과연 어느 것이 온전한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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